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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다 Apr 17. 2019

나는 천사병 말기 환자였다

거절을 하기 어려워하는 나를 위한 처방법

 상담을 시작한 지 3주가 지났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테라피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몰랐었다. 대충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을 바탕으로 테라피스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알았지 자세한 과정은 알지 못했다. 그 와중에 내가 가지고 있던 환상은 테라피스트가 내 증상을 바로 진단하고 해결책을 내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2주 동안 2시간의 세션을 했는데, 나의 테라피스트는 열심히 들어주기만 했지 딱히 내 상태가 어떠한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주변에 물어보니 실제로 진단은 상담의 중후반이 지나야 내려진다고 하고, 그 전에는 내 생각의 밑에 깔린 트라우마를 하나씩 발견하는 과정이라 했다. 그래서 약간 불안하긴 하지만 테라피스트를 믿고 계속 세션을 진행해보기로 했다.


 이번 주 나의 고민은 “남을 도와줄 때 나를 희생해서까지 도와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의 시간이나 리소스를 희생해가면서 부탁을 들어주는 나 자신이 화가 나고, 동시에 좀 더 이타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느껴진다.”였다.


 예전에 나를 떠올려 보면, 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를 하지 못했다. 본인을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도와주는 사람을 바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거주 국가를 옮기면서 나는 천사병에 걸린 바보가 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영국에서 인간관계를 처음부터 쌓아 올리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이 관계를 잃지 않기 위해 상대방에게 관계의 선택권을 더 많이 쥐어줬기 때문이다. 나는 상대방에게 무리하게 맞춰주고, 상대방이 싫어하지 않는 행동을 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둘째는 문화 차이였다. 상대방에게 부탁을 당당히 하는 서양인들을 거절하기가 솔직히 힘들었다. 그들은 당연히 내가 무리해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부탁을 하는데, 그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휘말려있었다. 그렇게 나를 깎아내리고 희생하면서 쌓아 올린 관계는 건강해질 수 없었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테라피스트는 “삶의 우선순위”를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동안 남을 우선시해서 나를 희생해가며 남의 부탁을 들어준 결과를 보라고 했다. 도움을 청한 당사자는 쉽게 문제를 해결하고 지금 집에서 편안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정작 남을 도와준 너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며 센터에 와서 테라피를 받고 있지 않냐고. 이것이 정말 도움을 줌으로 인해 네가 바라는 결과냐고 나에게 반문해왔다.


 나는 그동안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 그래서 상대방을 위해서 나를 지나치게 희생해온 것이다. 테라피스트는 자기 자신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했다. 또한 도움에 대한 정당한 대가나 칭찬을 바라는 것도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했다. 모금을 하기 위해 마라톤을 뛰고 본인 만족을 위해 그 사실을 여러 사람에게 알렸다고 해서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것처럼.


 테라피스트가 남의 기분을 지나치게 살피는 나를 위해 하나의 숙제를 줬다. 상대방이 기분이 나빠보이면 가만히 내가 그 사람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만약 아무 잘못이 없다면 그 사람의 기분이 나쁜 것은 그 사람의 일이니 그냥 넘겨버리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본인에 대한 자신과 확신이 있으면 이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만약 설사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다른 상황이니, 그 상황이 닥치면 솔직하게 사과하고 해결해나가면 된다고 했다.


마침 직장에서 나에게 무리하게 일을 떠넘기는 동료가 휴가를 갔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비슷한 상황에 처해지지는 않았지만 왠지 다음번에는 잘 밀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든다. 상담을 계속하면서 '나를 가치 있게 여기는 법'에 대해서 배울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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