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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린 Nov 02. 2021

자꾸 블로그 글을 지우게 된다.

고칠 수 없는 글삭튀 본능

3년 차 브런치에 글이 0개인 이유 : 매번 며칠 뒤에 지워 버려서...


창작물이라면 뭐든 안 그런 것이 있겠느냐만, 과거 작품을 보고 스스로 오글오글함을 느끼는 것이 가장 심한 것은 단연코 글인 것 같다. 영상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것들은 아무리 어설프게 만든 것들이라도 전부 기념으로 보관해 두는 반면, 글은 매번 부끄러워서 지우게 된다. 장르가 일기든, 소설이든, 감상문이든, 정보글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다. 일기장 어플이나 블로그를 통째로 날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어디 백업이라도 해 뒀으면 더 먼 훗날에 추억 삼아 꺼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아까워라!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글 역시 언제 삭제할 지 모른다. 대체 나는 뭐가 문제일까?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해 보았다.




1. 글 실력이 형편없어서

의식의 흐름대로 써 갈기다 보니 발생하는 비문들, 지나치게 길고 가독성 떨어지는 문장들, 감정 과잉처럼 보이는 쓸데 없는 수식어들, 100% 내 의도를 반영하지 못하지만 대안을 찾을 수 없어서 선택한 단어들...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볼 때 마다 이런 것들이 계속 발견되는데 수정하자니 귀찮아서 그냥 삭제를 하게 된다. 이런 구린 글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 라는 것인데, 정 그렇다면 비공개로 돌리거나 개인 파일로 백업이라도 해 두면 좋았을 것을...


2. 그 당시에 가졌던 가치관이나 감정들이 바뀌었다.

아마 이 이유가 제일 큰 것 같다. 글을 쓰게 되는 계기는 보통 뭔가를 깨달았거나, 결정했거나, 어떤 강렬한 감정 (기쁨, 분노, 우울, 행복...)이 휘몰아칠 때가 대부분인데,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닌 일들이 많다. 나이 들면서 점점 내면이 성숙하고 단단해졌기 때문일까. 이런 이유로 지우는 글들은 대개 남 탓 (주로 환경 탓, 정부 탓, 내 유전자 탓) 하는 글, 불평 불만 글들이라 다시 보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나? 싶을 정도로 낯설고 이상하다. 그래도 이런 사고 흐름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것, 이렇게 부정적인 인간도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괜히 지웠다...


3. 불행했던 시절, 안 좋은 기억들이 다시 떠올라서 치워 버리고 싶다.

내 인생은 흑역사 투성이다. 그 중에는 정말 기억 속 휴지통에 쳐 넣고 찰나의 순간이라도 다시 떠오르지 않도록 애써 억누르고 있는 끔찍하고 불행한 과거들도 있다. 예전 글을 보면 쓰던 당시의 기억들이 함께 떠오르기 마련인데,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지우고 싶은 일들까지 되살아나버리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지운다. 하지만 지난 역사가 흑역사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나의 삶이 하루하루 더 나아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4. 내 블로그에 있는 모든 글의 퀄리티가 좋아야 한다는 완벽주의가 발동했다.

누군가가 내 블로그에 들어온다면 어떤 글 부터 읽게 될까? 검색엔진을 통해 납치되는 경우도 있을테니, 어떤 글이든 내 블로그의 첫인상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런데 내 블로그에 와서 읽은 첫 번째 글이 구리다면... 내 블로그 전체가 구려 보이겠지... 그래서 그 어떤 글도 허접하거나 빈약하거나 쓸데없으면 안 된다라는 강박관념이 자리잡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내 글 목록을 펼쳐놓고 서바이벌 게임을 하듯 제일 구린 글을 하나씩 삭제한다. 결국 최종에 최종까지 남긴 글들도 다시 읽어보면 구려서 지워 버리게 된다. 수익성 블로그도 아닌 브런치에서 왜 그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5. 뒷조사 당할 경우를 대비해 웹 상에 흔적을 남겨두고 싶지 않다.

자의식 과잉일수도 있는데, 실제로 뒷조사 당한 경우가 꽤 많아서 이런 부분에 특히 더 조심스러워지더라. 면접관들이 내 메일 주소를 토대로 SNS를 찾아봤던 것, 구남친이 헤어진 뒤 몇 년이 지나서까지 염탐했던 흔적, 한때 인터넷 방송을 했었는데 지금은 방송을 하지 않으니 당시 팬(?)들이 궁금해서 찾아보고 저를 찾고 있었다고 달아 놓은 댓글, 뭐 여기까지는 아무렇지 않은데... 뒷조사에 환멸을 느꼈던 결정적인 계기가 한 번 있었다. 회사에서 성희롱을 당해 신고했더니 본부장이 내가 알려준 적도 없는 인스타그램을 멋대로 염탐해서 성희롱을 당했던 3개월 남짓한 기간에 여행 사진 한 번 올린걸 증거로, '피해자답지 않다,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성적 수치심을 느낀 것이 맞느냐'며 물었었던 일... 어떻게든 회사에 문제가 없다는 근거를 찾고 싶었던 걸까. 아무튼 그 트라우마로 더욱 더 SNS와 블로그를 자체 검열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글도 언젠가 삭제할 것 같다. 지금까지 100% 확률로 글을 지웠으니 이 글 역시 마찬가일 거다. 하지만 가능하면 참아 보려고 한다. 100% 확률로 삭제하고 100% 확률로 후회했으니까. 이번 만큼은 지우지도 후회하지도 말자! 어떤 구린 글이라도 쌓아 놓다 보면 나중에 다 추억이 되리라. '그 땐 이렇게 생각했었지...', '그 때는 이런 감정이었어...', '내가 이렇게 글을 형편없이 못 쓰던 시절이 있었네...' 라며... 그래서 지금 이 글이 내 브런치에서 처음으로 삭제되지 않는 글이 되길 스스로에게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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