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내 인생의 이야기라면 몰라도 당신 인생이라니 제목조차 잘 외워지지 않는다고 투덜대며 몇 년 책장에서 묵히다 이 책을 팔아치운 게 십년 전이다. SF라면 덮어놓고 책을 들쳐 보지도 못하는 나는 역시 문과 뇌를 가진 불행한 이과생 임을 다시 한 번 자각하고 좌절했던 기억.
십년 동안 달라진 건 없고 그저 습관처럼 책을 주문하다 새로 나온 테드 창의 두번째 소설을 장바구니에 넣었고 집에 온 새 책의 띠지 광고를 읽으며 뭔 대단한 이야기 이길래 이리 호들갑이냐며 의무감에 펼치고는 ‘빠져들었다.’ 한 장 한 장 야금야금 읽으며 눈으로 형광펜 하이라이트 치고 덮고 한숨 쉬고 메모하고 비망록 쓰면서 읽는 순간 순간을 만끽한 연말이었다.
이런 저자라면 책이 나오는 족족 다 읽고 감탄해야 제 맛인데 겨우 십년 전에 내가 읽지 않은 한 권의 책만 남았다니, 아쉬워하며 새로 나온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사서는 같은 짓을 반복하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아아 이 책은 독후감을 꼭 써두어야 해!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 책에 대해 한 줄도 쓸 수 없다. 물론 십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내 뇌는 문과와 이과를 오가며 불행회로를 돌리는 데만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내 능력과는 별개로 이 인간이 이미 모든 사건들(=세계들)과 사유에 대해서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저 감탄하고 동의할 수 있을 뿐, 더 무슨 상상력을 덧붙이고 소감을 말할 수 있을까.
특히 내가 제일 몰입했던 <이해Understand>의 한 부분을 읽으며 이거 이십 대에 썼으면 진짜 이 작가는 미쳤다, 싶어 검색해보니 91년에 나온 단편으로 작가가 고작(!) 스물 다섯 살에 쓴 사실을 확인하고 할 말을 잃었다.
- 나는 유교의 ‘인’ 개념을 떠올린다. 박애라는 불충분한 표현으로는 충분히 그 뜻을 전달할 수 없는 이 개념은 인간성의 정수에 해당하는 특질이며, 오로지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서만 함양되고, 고립된 개인이 실현할 수는 없는 종류의 것이다. P.87
물리든 컴퓨터든 우주든 극히 이과-기계적인 세계(즉, 내가 잘 모르는)에 대해 빈틈없이 구성하는 것은 어린 천재들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고립된 개인이 실현할 수는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문장에서는 너무 조숙해서 말이 없어진 아이를 발견한 것처럼 감탄하며 안타까워했다. 이거 그 나이에 몰라도 되는 건데, 왜 이런 것까지 벌써 알아버린 거야.
이해 뿐 아니라 나머지 소설들도 테드 창의 매력은 이 곳 저 곳에서 지뢰처럼 터진다. 언어, 시간, 인지, 이름, 수학, 진리의 화려하게 흩뿌려진 단어들을 게임 팩맨 처럼 하나하나 삼키며 따라가다, 문득 만나게 되는 ‘우리는 어떤 인간일 수 있을까요’ 라고 묻는 테마의 여러 다른 질문들. 아아 한숨 쉬며 책장을 잠시 덮을 타이밍.
2020-03-06 새벽2시
그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지금, 나는 만족스럽고 내 기분은 한껏 고양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내가 느낄 아쉬움이나 읽기 전에 테드든 창이든 숨이든 아무 관심도 없었던 과거도 상관없이. 나는 이 책을 읽고 기분이 좋아지리라, 라는 수행문을 글로 발화하고 있을 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것은, 인생이 별 게 없다는 것은, 끝이 정해져 있어서,라기 보다 나 역시 무슨 짓을 얼마나 열심히 많이 하든, 그것도 주어진 인생의 시간 안에, 수많은 인류가 대를 이어온 평균적인 지점을 뚫고 솟아오를 가능성이 없다는 것, 아니 좀더 관대한 입장에서 0에 수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본다는 것, 지금의 내가 그렇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절반을 딱 찍고 턴을 막 돌았다 친다면. 그러나 최소든 최대든, 극치의 환희든 지옥의 끝이든, 가지 않을 도리는 없다. 이 허무의 그림자는 평생 나와 함께 하겠지만 안보이는 척,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한다.
나는 남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똑같이 뚜벅 뚜벅 걸어가고 있겠지만, 내 태도는 달라져 있다. 역시, 끝을 안다고 한들 지금의 과정에서 내가 다르게 선택할 '자유의지'가 무엇이든 결과는 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