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마케터 볼 때 찢어지는 내 맘
마케팅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고 생각하던 시절, 내 출근송은 페럴 윌리엄스의 "Happy"였다. 아침 20분 출근카에 틀어놓고 달리는 그 길은 언제나 상쾌했던 기억. 오늘은 받은 편지함에 어떤 이메일들이 와 있을까 궁금해하며 사무실 문을 열었고, 아주 알차고 루틴이 확실한 나의 일과를 사랑했다.
얼마나 좋았냐면, 서른네살에 인생의 정점이 지금이라는 걸 인지해서 불안할 정도? 그야말로 내가 없으면 내 제품과 회사가 안돌아간다는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과 패기로 충만했던 시절. 연봉 낮은 거 빼고 일이 최고라 생각했고, 회사가 재미없다는 사람은 일을 대충해서라고 단정지었다. 그리고 확실히 비교대조군을 가질 수 있었다. 나름 고액연봉에 시간 많은 일을 하며 온갖 화려한 취미생활 백만개를 할 때보다, 잠자는 시간과 운동 시간을 빼고 온종일 일에 매달려 있어도 그 생활이 훨씬 나를 생기있게 만들어준다는 걸.
사람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딘가에 쓸모가 있어야 살 맛이 나는 법이다. 게다가 젊기조차 하면 더할 나위 없고. 그 시절의 나는, 누가 나에게 말로 전해주지 않아도 온종일 나를 필요로 하는 내 새끼같은 일의 부름에 24/365 대기조로 응답 중이었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전국을 기차로 누비며, 하루 수십건의 민원과 컴플레인을 처리하면서도,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고, 그 일이 시즌별로 돌아가고 있는 데 결과까지 늘 우상향이었기에, 와.. 이 페이스라면 앞으로 50년은 더 해도 질리지 않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재미있고 일이 손에 촥 붙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간과 마음이 여유로웠다. (쓰는 동안 또 행복해지네 훗)
그래서 그만뒀다. 지금 딱 그만둬야 해. 아쉬워서 미칠 것 같을 때, 이제 이 일이 루틴하게 자알 돌아갈 때, 내 손에서 일을 떠나보냈다. 이제 나는 다른 것을 찾아야 하니까. 문제는 아직도 찾고 있다는 거지만 ㅠㅠ (벌써 오년째 방황....)
그래서 그런가, 동료 중에 PM이나 마케팅을 하는 자들에겐 늘 자비로울 수 없다. 원래 톰과 제리같은 사이인 영업으로 오니 더 그러하다. 특히 방어적인 PM과 일로 만날 때마다 아주 죽을 맛이다. 그 사람을 미워할 필요까진 없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업무협조도 원활하지 않고, 건건이 서로의 입장이 반목하게 되는 건 분명 팀의 스탠스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이 흘러넘치지 않는 마케터와 일 한 번 해보시라. 계속 일의 앞뒤를 가지고 닭과 달걀 놀이를 하며 속터지는 디스커션을 하 수 있다.
오늘 모처럼 그런 이벤트가 있었다. 그런 사람인 줄 알지만, 그래서 또 내가 일이년 전 참지 못하고 전화통화로 '제발 부탁인데 공무원처럼 일하지 않기를 바란다(실은 공무원들이 제일 빡세고 바쁘다는 거 잘 압니다만 관용어구로 이해 플리즈)'는 쓸데없는 부탁까지 했었던 사람인데, 육아휴직 끝나고 서로 살얼음 위를 걷듯 됴심됴심 커뮤니케이션해왔는데, 신제품 런칭을 하면서 역시 또, 말과 말 사이에, 글과 글 사이에 거스러미가 낀다. 하지 않은 말 사이에서 신경전이 일어난다. 후아.. 휘곤해. ㅠㅠ
마케터가, 자고로 마케터란, 제품의 탄생과 성장을 도모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 목적을 위해 주변인 모두를 참여시키고 공동의 성과를 찬란하게 내기 위해 본인이 처절하게 오너십을 가지고 일을 주도해야 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장이 말려도 내 제품의 주인은 나니까, 내가 드라이버니까, 내가 원하는 방향성을 시장에서 테스트 받을 거니까. 그래서 내 맘대로 할 수 있으려면, 일단 열심히 해야 한다. 많이 알아야 하고. 까기 위해 덤비는 수많은 의구심들, 푸쉬백들을 사전에 방어해야 하고, 하기 싫다고 드러누운 영업부들이 벌떡 일어나 이 제품은 누구누구한테 가져 가면 먹힐 것 같다, 팔면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 들게 뽕가루를 정기적으로 뿌려드려야 한다. 제품을 사겠다는 단 한 명만 있어도 바짓가랑이 붙들고 이 한 사람이 열사람에게 추천해줄 마음을 가지게끔, 나를 봐서라도 사게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근데.... 매니저를 들먹이며 내용없는 이메일로 부탁인지 업무지시인지를 해대는 PM을 만나니, 기분이 나쁘다 좋다 판단 이전에, 이미 기운이 쫙 빠진다. 얘는 도대체 지가 하고 싶은 게 뭔데? 길지도 않은 메일에 그런 투지와 의욕이 일도 안보이는 사람. 늘 회사와 매니저라는 바리케이트 뒤에 숨어서, 밖에서 문전박대 당하며 월급받는 조건으로 욕먹는 게 일상인 영업을 '그것밖에 할 게 없어서 하는 줄' 알고, 나는 지략가나 전략가다 생각하는 사람. 후.. 미안한데 넌 회사원 맞는데 적어도 마케터는 아냐. 그래 더 깎아서, 적어도 '좋은' 마케터는 아니야. 일단, 너 아무 것도 니 손으로 팔아본 거 없잖어. 근데 니가, 이걸 어떻게 팔아야 되는지 어떻게 알지? 응? 전단지 만들고 동영상 만들고 제품교육하는 게 피엠인 줄 아는 거 아니지?
뭐 경력도 짧고, 모범이 될 좋은 PM 선배도 본 적이 없고, 현재 매니저들도 그저 그렇다는 거 알아. 그래서 넌, 너의 최대 단점은, 니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모른다는 거야. 안타깝게도. 나가봤어야 알지, 너의 실제 시장 가치와 쓸모의 크기를. 어쩌면, 실은 어쩌면 너무 잘 알아서 소라게처럼 그렇게 등에 회사를 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급하면 머리 쑥 집어넣고 말이지. 늘 느껴져, 니가 얼마나 욕먹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지. 근데 난 많이 들었어. 니가 너보다 조금 더 어린 친구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근데 솔직히, 나는 이런 PM들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 어떻게 살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그까이꺼 대충 살다 가시면 되는 문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 접점을 가질 때마다 내 어떤 마음이 부서진다. 대충 일하는 사람들, 남이 보는 데서만 조신하게 있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남이 해놓은 걸 활용하려고 머리 쓰는 사람들, 남한테 돈 쓰는 거 아까워하는 사람들. 특히 열심히 안하는 마케터를 보면, 기분이 불쾌한 것은, 내가 마음 속에 굳건히 믿고 있는 어떤 기준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좀 심하게 말해서 범죄자를 보면 나와 무관한 일인데도 기분이 나쁜 것과 같은 메커니즘이다. 사람이면 그러면 안되잖아, 의 기준을 끌어내리는 새끼들. 우리, 라고 이름 붙이는 조직과 모임과 사회 안에서, 좋은 우리들이 더 좋은 사람들이 되려고 노력하는 어떤 부분때문에 본인이 득을 보고 있다는 거 인지 못하고, 서로의 기대치를 하향평준화해서 안전빵으로 살려고 하는 못난 놈들. 그런 인간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진다. 그렇게까지 하기 싫을 이유가 뭐야 싶고. 내 회사생활 국룰 중 하나는, 일하기 싫어서 울타리 치는 놈들을 만나면 흔쾌히 내가 도맡아서 일을 다 뺏자, 인데 그렇게 주변에 일 다 뺏기고 할 일 없어서 그 새끼가 유령처럼 회사를 배회하다 집에 가는 꼴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게 니가 원했던 거잖아, 라고 말해줄 필요도 없이. 그냥 말 섞는 게 시간 아까우니까.
으쌰으쌰 서로 열심히 하려고 난리치는 사람들이랑 같이 일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 시너지가 얼마나 중독적인지, 얼마나 더 삶을 살고 싶게 하는지. 그리고 그 쓸모의 효용이 데일리로 커질 때마다 요즘 유행하는 '자존감'이 얼마나 높아지는지. 게다가 보너스로 자신감도 종종 생긴다. 곧 또 의욕에 넘쳐 자빠질지라도, 종종 굴욕을 당하더라도, 뭐 어때, 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용기도 생긴단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내 주변이 그런 사람들도 가득 채워지고, 나도 그런 사람들에게 언제나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단 말이다.
그래서 지금 내적 갈등 중이다. 제품을 파는 것을 고민하는 일은 즐거운데, 담당자를 생각하니 열심히 하기가 싫어서. 인센이나 월급따위의 시스템적으로 내가 해야 해서 하는 게, 그 인간의 결과를 내는 원인이라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가 않아서. 그렇다고 열심히 안하면 성에 안차는 데 말이다. 물론 프리라이더는 늘 총량보존의 법칙이긴 하지만. 그리고 다행히, 이런 인간은 내가 속한 조직에 몇 없는 희귀템인 데다가, 나머지를 결집시키는 원동력의 불쏘시개가 되어주기도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