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탈곡된 부장의 뒷담] 세 시간 상담하고 내가 왜 더 힘드냐
봄이 오려나 싶은 2월 마지막 주 평일의 평화로운 오후에 온 카톡 하나,
"부장님 저 고민상담할 게 있는데요"
삼개월된 우리 신입사원이다. 우리 팀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들어온 귀한 신입아니신가. 소속팀이 하필 가장 마초적이고 빡센 팀이라 항상 짠한 맘이 있어서 OJT 이후 언제든 모르는 건 물어보라 했더니 종종 전화를 걸어오곤 했지만, '물어볼 게 있는데요'가 아닌 고민상담이라니. 뭐 뻔하다.
- ㅋㅋㅋㅋㅋ 퇴사 고민은 아니죠?
- 맞아요
- 헐, 15분 뒤에 연락드릴 수 있는데 그 정도 못기다릴 건 아니죠? ㅋㅋ
- 네
전화했더니만 목소리부터 기어들어간다. 무슨 일이에요, 왜요, 물어볼 필요 없고 내가 십 몇년전 느꼈던 딱 고 느낌 고대로다 싶어서 바로 질러드렸다.
- 왜요, 영업 이게 뭐야 싶어요? ㅎㅎ
- 이러려고 내가 공부해서 대학 나왔나 싶죠?
블라 블라, 한 이십분 길바닥에 서서 속사포랩을 하니 우리 똘똘한 신입이 대답도 없이 가만히 듣더니 한 마디 한다.
"부장니임, (깊은 한숨) 지금 너무 한 번에 많은 얘길 하셔서 귀에 잘 안들어와요"
ㅠㅠ 처음부터 뭔가 신입다운 빠릿빠릿함 대신, 눈치따위 평생 본 적 없이 해맑게 잘 자란 막내아들 같은 나른한 목소리로 저런 말을 하니.... 답답함에 속이 터진다. 아, 이 아해를 어이할꼬.
"휴, 맞아요. 이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6박7일 워크샵 주제인데 지금 전화로 하려니까 안되겠네. 일단 만납시다."
하여 이틀 뒤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나도 나름 메뉴를 정하고 갔건만 뭐 먹고 싶어요, 예의상 물어봐주니까 '저기 일층에 텐동 있던데요' 즉문즉답. 오케이 고고. 시간이 없으니 바로 정보수집에 돌입. 근데 뭔가 전혀 심각함이 없다. 뭐지 이건?
내러티브가 없이 지워진 녹음파일 틀어놓듯, 나른한 1.5배속으로 팀장님이 시키는 일이 내 일인지 모르겠다, 영업을 하는 게 너무 싫다, 워라밸은 지금이 좋지만(!) 일이 잘 맞는지 모르겠다. 딱히 적성이 있지는 않은 것 같고, 원래도 할 게 없어 공부해서 대학 나왔다.....
와놔, 이거 어디부터 얘길 해야 되나. 갑자기 데이터가 출력스피드를 올리니 말해야 할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어 안나온다. 일단 질문을 던져봤다. 도저히 아니다 싶은 이벤트가 있었냐, 부당한 대우를 받았냐, 영업이 뭐라고 생각하냐, 이것말고 아주 특별히 본인이 생각하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냐, 예상했던 업무랑 차이가 많이 나서 당황스럽냐, 형들이 많이 괴롭히냐, 본인이 팀에 도움이 안된다 생각하냐 등등등 뭘 물어봐도 시원하게 나오는 답이 없이 랙걸린 단어들만 띄엄띄엄. 아.. 살려주세요. 이런 발암형 대화 시러 ㅠㅠ
질문이 소용이 없어서 2차로 야단을 쳐본다. 하던 일 4개월만에 그만두고 면접 몇 군데 봤냐, (하나요) 헉! 지금 얼마나 구직란이 심각한지 아느냐, 배불러터져 죽는 소리하는 줄은 알고 있냐, (네, 정신못차리고 있는 거 저도 알아요), =_=, 더 힘들고 덜 힘들고가 아니고 적성 안맞으면 그만 둘 수도 있는 건데, 딱 3개월 다녀보고 나랑 맞다 안맞다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냐, (침묵), 뭐 짧은 시간이라도 판단할 수 있다, 결정은 너님의 몫인데 판단한 근거는 뭐냐, (음, 잘 모르겠어요), 그럼 퇴사하면 된다, 회사다니는 거 안맞을 수도 있으니깐. 근데 그럼 나한테 왜 상담하는 거냐, 지금 반대로 어떻게 하면 정규직 될 수 있을까요 상담하는 후배들이 훨씬 많은데, 진짜 세상 물정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 아니냐, (힝 맞아요, 아 근데 부장님한테 야단맞으니까 왜 기분이 좋지 히힝)
(첨부파일: 뭉크의 절규.jpg)
재미도 없고 교훈도 없고 심지어 절박하지도 않은 한가한 삼개월차 신입사원의 고민같지도 않은 고민 들어주는 인내심이 여기서 바닥났다. 바로 대포 발사.
"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주제로 너님과 대화 나눌 거에요.(안구에서 레이저도 같이)"
이후엔 당연하게 모든 이야기는 겉돌았다. 본인이 정확하게 뭐가 고민인지 정리도 안되고 남에게 고민이랍시고 하기엔 본인 고뇌가 충분히 익지도 않았으니까. 이 설익은 키워드 몇 개를 주워들고 와서 상담이랍시고 밥 먹고 차 마시고 내 시간 빼앗기고.... 그리고 불금이라고 친구랑 술 마시러 간다나. 아무리 내가 같은 월급쟁이 처지라도 미안한데 일푼어치도 공감이 안됐다.
근데, 근데, 근데... 룰루랄라 후배를 보내고 나는 왜 이렇게 뒷맛이 쓴가. 뭔가 못다한 말이 있는 것 같은 미진함과, 내가 과연 이 친구에게 필요한 '조언'이라는 걸 해주었을까 싶은 찝찝함. 그리고 내가 남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 있나,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옛날의 나와 무척 다르고, 옛날의 나와 지금의 이 친구는 뭔가 비슷해서, 그래서 뭔가 나도 듣지 못했던 그럴 듯한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왜, 우린 어디론가 가닿지 못했을까. 이 십여 년차의 간극을, 그 견뎌낸 시간의 배움을, 밥벌이의 소중함을, 근면함의 어려움을, 그러나 한편 포기하지 못할 뭔가를, 적성이든 취향이든 꿈이든 뭐든 차마 나에게 말하지 못했을 뭔가를, 우리는 이 날 대화로는 나누지 못했다. 아쉽게도.
나 역시 1년차 되기 전에 이딴 회사 때려친다 큰소리 맨날 치고, 맨날 술 먹고, 영업 못해먹겠다고 선배들 붙잡고 징징대고, 되도 안한 망언을 솔직한 척 당돌하고 멋모르는 신입사원답게 아무 말 대잔치 했던 기억이.... 없다고 못한다. 그러나, 나의 어떤 선배들은 이런 나와 시간 내서 대화라는 걸 해주고 술과 밥을 사맥여가며 달래고 어르고 우쭈쭈 해주고.. 그랬던 것 같은데. 뭐 대단한 말 들어보지 못한 것 같은데, 그건 그 선배들이 대단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에게 말해봤자 귓등에도 안들렸을 거라서 그랬을 것 같다. 아직, 나와 회사를 철저히 분리하고 일과 나의 생활이 섞여 들어가는 데 질겁하고, 혹시라도 내가 어떤 톱니바퀴의 작디 작은 하나의 날이 되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까봐 발을 못담그고 물가에서 서성이던 그런 초년생에게, 사회와 세상와 함께 알력싸움하며 나도 그 속의 하나가 될 수 밖에 없고 되려면 댓가를 치뤄야 한다는 걸, 겪기 전에 어떻게 말로 전할 수 있겠나 싶다.
이 나이먹도록 속썩이는 남편이니 자식새끼 없어서 얼마나 내 인생이 평화로운지 아냐고 유부 친구들 놀려먹고, 엄마가 너닮은 딸 낳아서 똑같이 당해봐라 할 때, 흥, 절대 그럴 리가, 그랬다가 엉뚱한 데서 한 방 먹었다. 그냥 본인 맘 가는 대로 가게 냅둬야지, 내가 뭔 대단한 영광을 보겠다고 상담을 해줬으까. 아마 그 친구도 고민하는 척 하며 친구들에게 신세한탄 하고 힘들다 징징대며 일년 이년 보내겠지, 그리고 대리, 과장 달면서 또 커나가겠지 뭐. 학교처럼 시간 지나면 졸업이라는 게 있는 것도 아닌데 퇴사가 그리 쉬운 줄 아냐 인마. 반성하면서도 다시는 신입사원 면담은, 내가 팀장되는 그 날까지 하지 않을 작정이다. 니 멋대로 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