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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태쀼 Jan 14. 2024

모태신앙이지만 '못해'신앙입니다

'나는 한 것 없습니다'라는 고백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말에 동의할 것이다. 성경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자들에 대해, 크리스천의 탈을 쓴 사기꾼, 죄인 과 같은 프레임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사회적으로 선행을 많이 베푸는 크리스천들에게는 참된 크리스천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그 말인 즉, 크리스천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사회적 선행이나 본이 되는 삶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실망스러울지 몰라도, 크리스천은 성경말씀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성경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말의 전제


'성경 말씀을 지켜야 한다'라는 말은, '성경 말씀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기독교 모태신앙으로서 살아온 나는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매일 새벽 아침에 말씀을 보면서 내 삶을 스스로 돌아보며 반성도 하고 또 새로 다짐 및 적용도 했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함께 이것들을 훈련하고 서로를 챙겼다. 그 과정가운데 각자가 삶 속에서 말씀에 '순종'한 것을 나누며, 서로에게 도전을 받기도 하고 동기를 부여하기도 했다. 이를 지속하기 위해 매일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며, 또 이를 원동력 삼아 이러한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지속하다 보니, 정작 성경에 나온 은혜의 개념과 계속 충돌하는 부분이 생겼다. 




은혜 아닌 '은혜'


기독교에서 은혜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기독교에서 은혜는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이 은혜의 개념이 강조되는데, 이 삶은 곧 은혜에 의한, 은혜를 위한 삶이다. 즉, 받은 은혜 때문이자, 은혜를 더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언제부터인지 이 개념에 의문이 들었다. 


첫째,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죄인에게 주님의 은혜가 내려졌다면, 애초에 이 은혜를 얻어내기 위해 죄인으로서 추가로 무언가 더 해야 할 것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다(마태복음 1:21). 만일 내가 죄를 하나도 안 짓고, 신앙생활을 하나님 앞에 멋지게 할 수 있다면, 애초에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필요할까? 반대로 얘기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얘기는, 어느 누구도 자기 죄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애초에 그리스도인에게 말씀 순종에 대한 동기로 은혜를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희석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고 외치면서, 왜 정작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는 말씀 하나하나를 다 지켜야 한다고 설명하는가? 


둘째,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함으로 얻어내는 은혜라면, 이것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호의라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성경말씀에 순종할 때 이 은혜를 받는다면, 이와 무관하게 하지 않을 때도 동일하게 누릴 수 있어야 은혜이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무언가를 하든 안 하든, 우리 행위와 무관하게 누릴 수 있어야 은혜가 진짜 은혜이다. 하나님 앞에 무언가를 해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이미 은혜의 정의에서 벗어나버렸다. 은혜가 아니고 대가(代價)가 돼버린다. 이러한 경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가 뭔가 했으니 이러한 나를 위해 뭐라도 주실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태도가 돼버리고 만다. 많은 이들이 은혜를 은혜로 받지 않고, 다른 '은혜'를 추구한다. 주님께 무언가 '갚아드려야' 한다는 식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사랑을 보이셨으니,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주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못하면) 주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으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성경의 은혜 개념은 세상의 것과 다르다


이 세상은 누군가 나에게 호의를 베푼다면 다른 형태로라도 갚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이 기독교 안에도 들어와 있다. 주님이 보이신 사랑을 어떠한 형태로든 갚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을 돌아보기도 하고 베풀기도 한다. 이러한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삶에서 이러한 모습이 드러난다고 해서 내가 주님께 어떤 것을 했다고 자랑하거나 드러낼 자격도, 공로도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위해 아무리 많은 것을 행했다 하더라도,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크리스천이 많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십자가 공로 앞에서 나의 공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리 많이 이루어도 한 것 없게 돼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인정받는다. 인간세상의 은혜는 갚을 것이 있는, 때로는 갚아야 하는 은혜지만, 성경의 은혜는 갚을 것이 없는 은혜이다. 이걸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언가를 해놓고서도 한 게 없다고 고백한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고, 노숙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더라도, 그에게 집을 장만해 주더라도, 그를 위해 내 전 재산을 내어준다 해도, 그를 위해 내 장기까지 내어준다 해도, 그를 위해 내 평생 시간을 내어준다 해도, 그를 위해 내 생명까지 바친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순종'을 한다 할지라도, 나는 주님 앞에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명령의 수준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인간이 100% 순도로 순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내 생명을 바쳐 이웃을 사랑한다 해도 달성할 수 없는 수준의 명령이다. 모든 명령은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듯 쓰여있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순종하실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 한 (요한복음 15:13) 말씀은, 친구인 자기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공로가 내 공로가 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복음(福音:복된 소식)이다. 




열심의 결과, 회의감과 허무함 속에서 내린 결론 


모태신앙으로서 성경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나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들일수록 마음 한편에는 회의감과 허무함이 커져만 갔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은혜는 내가 생각하는 그 '은혜'가 아니었다. 성경대로 살려하면 살려할수록, 성경의 명령의 수준과 내가 지킨다고 하는 순종의 수준의 괴리감이 크게 보였다. 제동장치 고장 난 폭주기관차처럼 내 신앙적 열심을 연료 삼아 모태신앙으로서 살아왔다. 괴리감, 회의감, 허무함이 이 고장 난 열차에 제동을 건다. 그리고 성경에 담긴 '명령'의 의미와 의도, 명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복음을 알면 성경에서 어떤 명령을 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다 성취하였음을 고백하게 된다. 내가 그 명령을 보고 뭔가를 한다 할지라도,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 되었다. 모태신앙으로 시작해서 모든 성경말씀에 순종하려고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그러나 복음의 의미와 성경에 숨겨진 진의를 알고, 주님 앞에 언제나 '나는 할 수 없고 나는 한 것 없는 자'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내 신앙은 한 것 없는 신앙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 모태신앙이지만


'못해'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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