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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태쀼 Jan 27. 2024

순종하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명령의 진의


착하게 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았다


십수 년 전, 본 글의 제목과 비슷한 책이 서점에서 한 때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책은 기존 기독교의 틀을 깨는 듯한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은 당시 기독교 안에 널리 퍼진 성경에 대한 오해를 깊이 있게 다루는 책이 아니었다. 크리스천 남성으로서 여성적 이미지로 포장되어 ‘착하게’만 살지 말고 기독교적인 남성성을 회복하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이 책이 지금쯤 출판됐다면, 어떤 이들은 저자의 성인지 감수성에 문제를 제기할 법도 하다. 책 제목만 봐서는 기존에 성경을 보는 오해된 시각을 바로잡아줄 것 같지만, 책 내용은 기독교적 남성성의 회복이라는, 다소 지엽적인 소재에 국한돼 있다.


기존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떨까? 이 시각을 보다 세분화하면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Q1.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Q2. 창조주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Q3.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보통 다음과 같이 답을 한다.


A1. 하나님의 사랑 / 복음 / 예수 그리스도 / 크리스천의 삶의 규범

A2. 크리스천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기 위함

A3.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삶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신앙생활을 십수 년 한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대답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에는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했든) 크리스천은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논리로 항상 귀결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의 모습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기독교인들이 더(못된 짓을 많이) 한다


성경의 가르침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에는 ‘기독교인은 성경 말씀을 따라 더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더 높은 기대치가 반영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가르침 내지는 명령을 전하면서도, 정작 이것을 전하는 이들의 삶에 대해 들려오는 소식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식들이 많다. 크리스천의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말한다.


기독교는 모순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그런데 사실 이는 기독교의 모순이 아니다. 그저 크리스천의 수준미달이다. 더 정확하게는, 성경의 요구 수준은 너무 높은 반면, 인간의 수준과 능력이 형편없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명령들은 애초에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수준의 명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성경의 모든 명령을 평생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성경의 명령이 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성경에서 요구하는 이 명령의 수준은 어떠한가? 나는 죽고(없고) 내 이웃만 있는 그런 사랑이다. 이 사랑은 나를 위한 모든 것을 남을 위해 내어 주는 사랑이다. 내가 가진 모든 돈, 재물, 시간, 능력, 생명까지도 남을 위해 쓰는 사랑이다. 자신의 것 일부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사랑이다. 그런데 혹자는 다음같이 반문할 수 있다.


완벽하진 않아도, 할 수 있는 만큼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럼 성경 말씀을 지키지 말라는 말인가요?


사람이 성경 말씀을 최대한 지키면서 산다고 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지에 대한 예화가 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이다. 바리새인은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율법에 대한 지식이 높고 스스로 이를 철저히 지킨다는 우월감 속에 있던 자들이었다. 반면 세리는 세금을 징수하던 자들로, 착복을 일삼아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자들이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처럼) 갈취, 불의, 간음을 하지 않았으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신의 행위를 드러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죄인인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구했다. 예수께서는 이 둘 중 세리를 보고 의롭다 하셨다(누가복음 18:9-14).


성경은 의(義)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낸다. 의는 죄와는 반대된 개념으로, 죄가 없이 완전무결한 상태를 의미한다. 위 예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평소에 죄를 일삼던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으로 의롭다는 평을 받았고, 반면 ‘깨끗한’ 행실을 보이던 바리새인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로움’은 사람의 착한 행실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를 가진 자가 얻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를 가진 자가 내어놓는 반응은 ‘나는 죄인입니다.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반응이다. 애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가 없던 바리새인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고, 그 의를 소유한 세리는 의롭다는 말을 들었다. 의로움의 근원이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세리의 말 한마디로 그저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가 겸손하게 입으로 고백한 모습과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역시나 바리새인과 똑같은 수준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있냐는 것이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유무는 곧 의/불의의 기준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지키는 율법의 수준은 언제나 피조물이 시도하는 수준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신으로서 모든 율법을 완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결정적으로 하나님 명령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바리새인은 스스로 ‘내가 지킬 수 있고, 지켜야 하는 말씀’으로 보고 있었고, 세리는 ‘내가 지킬 수 없는 말씀, 나는 은혜가 필요한 존재’로 보고 있었다.




실현 불가능한 명령의 의미


바리새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인간이 지킬 수 있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기가 행한 의를 드러내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잘난 존재로 나타내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다. 자기가 잘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말씀에 순종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반면 세리처럼 하나님 말씀을 ‘인간이 지킬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 앞에 자연스럽게 낮아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한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실현 불가능한 명령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대한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너희들은 그 명령을 온전히 지킬 마음도 능력도 없음을 알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높은 수준의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율법을 다 지키고 이루신 자이다. 그래서 그를 믿는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실현 불가능한 명령은 그 명령을 홀로 성취한 예수 그리스도만을 보게 한다.




명령의 역설(逆說)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에 어폐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만 온전히 실행하실 수 있다. 그래서 크리스천으로서 성경 말씀을 볼 때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면, 먼저 스스로가 과연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자인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모든 명령의 끝에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을 내보라. 그러면, 성경의 명령을 봤을 때 자연스럽게 다음같이 생각이 이어진다.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5:43,44, 마 22:39) → “나는 내 원수는커녕 이웃도, 친구도, 아내도, 남편도, 자녀도, 부모도 완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원수 같은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이셨다”(엡 2:14,16)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 “나는 나 좋을 때는 기뻐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기뻐할 수는 없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기쁨의 참된 이유이다”(느 8:10)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 “나는 최대 몇 시간도 기도할 수 없다” → “오직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만이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신다”(롬 8:26,34)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 “나는 내가 좋을 때는 어떻게든 감사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지 않는다” → “예수 그리스도만이 감사의 이유이다”(롬 7:25)


모든 명령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 내는 것이 성경의 의도이다. 말씀을 보고 ‘이대로 최대한 순종하고 이뤄야겠다’는 다짐이 든다면 성경의 의도대로 말씀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난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 이 명령을 다 이루셨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온다면 성경의 의도대로 말씀을 본 것이다. 성경에서 완벽한 수준으로 말씀에 순종하라 했다 하여, 최선의 노력을 들여 안간힘을 써서 이를 지켜내려 하는 것이 수많은 교회 안에 퍼진 오해이다. 말씀에 순종하라는 듯 읽혀지나, 온전한 순종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순종하려는 것이 아닌, 모든 율법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찮은 수준'의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완벽한 순종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완벽한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성경 속 명령의 진의(眞意)다.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누가복음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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