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견고하게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해가고 있는 백산안경점
수많은 안경 브랜드들은 화려한 디자인과 컬러, 다양한 마케팅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한다. 그러나 여기 세월의 풍파 속에서 묵묵히 안경의 본질만을 생각한 브랜드가 있다. 잠시 잠깐 지나가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견고하게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해가고 있는 백산안경점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겐 단순한 안경을 넘은 대상이 된다. 제품은 언제 어디서든 다른 상품으로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무수한 세월 속에서 쌓아온 디자인 철학과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는 결코 대체될 수 없음을 그간 이들이 걸어온 궤적을 보면 느끼게 된다.
1883년 도쿄 닌교초에서 시라야마 안경점이라는 이름으로 첫 영업을 시작한 백산안경점은, 1945년 전쟁 중 화재로 인해 매장이 전소되었다고 한다. 이후 1946년 우에노에서 백산안경점이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재오픈할 수 있었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같은 자리에서 영업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당초 시라야마 안경점이 있던 자리에는 ‘도쿄 안경’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이 재개되었으며, 백산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확장성을 가지고 운영되며 대형 안경 체인점으로 성장하게 된다.) 창립자 성에서 따온 이 백산이라는 한글 표기는 일본어 표기로 바꾸면 하쿠산, 그리고 같은 한자가 사람 이름으로 올 땐 시라야마로 발음되니 결국 백산안경점이라는 기업명은 창업자의 성에서 비롯된 셈이다. 이 백산안경점의 본격적인 역사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현 대표이자 디렉터, 그리고 디자이너이기도 한 ‘시라야마 마시미’로, 당시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백산안경점을 널리 알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1950년에 창업자의 증손자로 출생한 그는 1972년 영국으로 2년간 디자인 유학을 떠나 1974년 귀국하여 백산안경점에 입사하게 된다. 바로 이듬해부터 자신만의 디자인을 담은 안경을 출시하며 당시까지만 해도 백산안경점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안경 제작을 시작한다.
백산안경점의 첫 작품이자 그의 디자인이 오롯이 담긴 첫 안경인 행크(HANK)의 출시로 나름의 호평을 받은 이후 1976년 브릭(BRIGG)을 거쳐 1978년 드디어 백산안경점의 역사적 모델이 된, 메이페어(MAYFAIR)를 출시하기에 된다. 많은 분들이 백산안경점을 인식하게 된 중요한 모델인 이 메이페어는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이 피격 당시 착용하고 있던 모델로써 이 사건 이후로 백산안경의 터닝포인트가 된 모델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시라야마 대표의 친구는 자신이 운영하는 빈티지 샵 한 편에 시라야마의 안경을 전시해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존 레논의 아내 오노 요코와 일본 여행 중 우연히 들른 이 곳에서 백산안경을 발견한 뒤 그는 매장 방문을 예약했으나 팬들로 인해 직접 방문이 힘들어졌고, 이에 시라야마 대표가 직접 호텔로 안경 모델 몇 개를 들고 가 안경을 맞춰주었다고 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존 레논과 시라야마 대표와의 만남은, 이후 존 레논의 죽음과 함께 더더욱 극적으로 회자되기에 이른다. 존 레논의 죽음을 마케팅에 활용하고 싶지 않아 한 시라야마 대표가 메이페어를 단종시켰기 때문이다. 그토록 바라지 않던 마케팅이었음에도, 단종 조치로 인해 존 레논 팬들로부터 ‘존 레논이 썼던 최후의 안경’이라는 관심과 애정이 더더욱 쏟아졌으며 이를 계기로 백산안경점은 글로벌한 대중성을 쌓게 된다.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을 지양하고, 오로지 착용감에 집중한다는 백산안경점만의 철학
이후 기존 백산안경점이 주력했던 디자인, 즉 미국 빈티지 프레임의 영향을 받은 70년대 프레임에서 벗어나 다양한 디자인의 제품을 출시하기 시작했고, 90년대에 접어들며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한 장인정신과 절제된 컬러를 기조로 한 디자인을 출시한다. 그리고 이는 당시 일본의 경기침체와 맞물려 흥행을 하게 되며,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을 지양한다’는 그만의 철학과 ‘디자인 적 요소를 배제하고 착용감에 집중한다’는 백산안경점만의 가치가 확고히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과거로부터 차곡차곡 쌓은 유명세에도 백산안경은 확장을 통한 대중성보다는 장인정신과 소매점의 이미지를 여전히 지향하고 있다. 시라야마 대표의 고집스러운 철학이 현대에도 여전한 기업이념으로 작용하면서 확장보다는 내실에 집중한 결과이기도 하다. 백산안경점이라는 이름, 즉 기업 이름 끝에 붙은 (店)점을 굳이 고수하는 것 역시, 고객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소매점의 인상을 줘서 고객이 더 친근하게 느끼고 부담 없이 찾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라고 그는 말한다. 백산안경점 특유의 굿즈들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출시하는 것 역시 소비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하니, 자신들이 추구하는 디자인적 가치와 함께 언제나 소비자 위주로 생각하는 그만의 철학이야말로 백산안경점의 가장 큰 자산이 아닐까.
확장보다는 철학, 오로지 고객의 만족만을 고민하는 안경 브랜드
특정 브랜드만으로 매장을 채워 넣은 안경점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지만, 그가 추구하는 바는 백산안경만의 철학이 다른 브랜드들과 섞이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수입을 원하는 업체들이 아무리 많아도 응하지 않았던 건 단독 매장이 아니면 그 철학을 온전히 새로운 고객들에게 전하는 데 무리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2016년에 오픈한 한국 신사동의 단독 매장은 말 그대로 단독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본을 벗어난 첫 매장은 그런 그의 고집스러운 철학이 반영된 결과인 셈이다. 이 곳 서울 매장의 존재 덕분에 메이페어 한정판 모델을 구매할 수 있다는 건, 비단 존 레논의 팬이 아니더라도 그 기회만으로 매력적인 일임에 분명하다.
유행하는 디자인의 안경을 찾는다면 백산안경점은 좋은 선택이 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안경을 너머 철학을 담은 안경 브랜드를 찾는다면, 그리고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지향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라면 다른 선택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백산안경점은 현재 일본에 단 5개점, 그리고 한국과 홍콩에 각각 1개씩의 매장만을 운영하고 있다.
각자의 철학이 있는 고유한 브랜드에 대한 보다 다양한 기사와 글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ternastudio.co.kr/news/list.html?cate_no=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