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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닥다리 에디 Mar 20. 2021

브랜드가 가진 철학의 힘

리사르커피가 쌓아온 시간의 힘

만화 드래곤볼의 주인공(뒤로 갈수록 헷갈리지만) 손오공은 잔혹하기 짝이 없는 악당들과 수없는 전투를 벌인다. 겨우겨우 그 악당 쓰러뜨리더라도 마치 골목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연이어 등장하는 새로운 악당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손오공이 없다면 등장할 악당도 없어질 테니 차라리 손오공이 없어지는 게 지구 평화를 위해 더 나은 일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작가의 세계관이 나처럼 편협하지는 않은 덕분에 손오공은 계속 (질경이처럼) 살아남았고, 그 결과 드래곤볼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대작으로 우리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처럼 손오공이 질경이처럼 목숨줄을 연명할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은 바로 원기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원기옥이란 기술에 대해 말하자면, 주인공 손오공이 악당에게 흠씬 두들겨 맞다가 (혼자만 얻어맞는 게 일순 억울한 마음이 들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좀 나누어달라고 읍소하는, 호소력과 소울 담긴 퍼포먼스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모은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를 만화에선 원기옥이라 부른다. 이 에너지를 모으기 전까지만 해도 두들겨 맞던 손오공은 마침내 해냈다는 표정으로 악당을 향해 원기옥을 발사한다. 손오공은 단지 거들뿐, 모아진 원기옥이 악당에게 명중되면 악당은 악당답게 처연한 모습으로 사라진다. 지구엔 다시 (찰나의) 평화가 찾아온다.


앞서 이야기했듯 원기옥을 모으기 전까지, 그 과정은 무척이나 지리하고 험난하다. 모은다고 가만히 내버려 둘 악당도 아니거니와 결정적으로 시간이 소요되는 기술이기 때문에 이는 무척이나 위험할뿐더러 어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손오공이 주인공인 덕분이기도 했겠지만 (내 기억엔) 손오공을 제외하고 원기옥을 사용한 이는 모두 그 결과가 썩 좋지 못했다는 점을 봐도 쉽사리 쓸 수 있는 기술은 아니다.

도대체 이 작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원기옥 이야기를 들먹이나 싶은 생각이 슬슬 들 수 있어 서둘러 말하자면, 오늘 맛 본 리사르커피를 앞에 두고 나는 문득 이 원기옥이 생각났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눌러앉을 좌석 또한 마땅치 않고, 에스프레소를 제외한 다른 어떤 메뉴도 없는 이 카페를 방문한 뒤 나는 거대한 원기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커피 맛에 둔감한 편인 내게도 이 에스프레소는 그야말로 근사한 맛이었다. 잔뜩 기대하고 청담점을 방문했음에도 그 기대를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값비싼 커피 마시며 우린 커피 그 자체보다 그 카페의 분위기와 공간을 소비하는 셈이라고 이야기한다. 카페는 맛을 넘어 사람들의 피드에 올라갈 수 있는 시각적 요소에 신경 쓰며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길 기대한다. 이 디저트도 찍어서 올려보라고, 이 근사한 카페의 원목 가구들, 새하얀 대리석도 함께 사진에 담기길 바라마지 않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마케팅은 그 효과가 빠르다. 오픈과 동시에 다양한 캠페인을 동반하며 공간은 물론 패키지와 디저트까지 컨셉추얼 한 디자인을 소비자들에게 난사한다. 나 또한 시각적 즐거움을 사랑한다. 공간에서 구현되는 다양한 분위기를 체험하는 것도 카페를 방문하는 즐거움 중 하나다. 다만 이 곳 리사르커피를 방문해 본 뒤 커피를 즐기는 다른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공간으로써의 카페가 아닌, 커피 그 자체의 맛과 향을 즐기는 방식에 대해 말이다.


약수시장 인근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고 하는 이 리사르커피는 에스프레소 바의 형태로 운영된다. 테이크아웃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노트북 하며 오래도록 분위기를 음미할 수 있는 넓은 공간도 아니다. 오로지 에스프레소 한 잔뿐, 이 곳에 다른 필요는 없다. 아침 7시에 오픈하는 카페가 어디 그리 흔할까.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문화를 그대로 구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직장인들이 출근길에 들러 한 잔 입에 털어 넣고 일어나는 그림을 원하셨다는 대표님의 인터뷰를 굳이 찾아 읽고선 그의 철학을 곱씹게 된다. 그 어떤 컨셉추얼 한 이미지도, 아주 대단한 온라인 마케팅 없이도 사람들은 매장으로 몰려든다. ‘마케팅’이라는 단어가 마치 요술방망이처럼 쓰이는 작금의 시대에 이 기이하고도 신묘한 힘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원하는 바를 관철하고자 한 리사르커피의 철학과 그것을 계속 축적해온 시간의 힘이라고밖에.


원기옥을 모으는 그 지리한 시간이 끝나면 그 힘에 대적할 자는 없다.(적어도 만화 속 세상에서는) 앞으로 리사르커피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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