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사촌형과 함께 살던 시절. 형이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시네마 천국』을 우연히 발견했다. 나는 형이 없는 틈을 타 조심스럽게 비디오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넣었다. 빌린 테이프라 함부로 다룰수도 없었고, 형이 돌아오면 들킬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플레이어에서 '드르륵' 소리가 나며 테이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영화, 낯선 언어, 하지만 영화는 신기하게도 어렵지 않게 다가왔다. 토토와 알프레도의 우정, 마을 사람들이 모여 영화를 보는 모습. 화면 속 풍경과 인물들은 낯설면서도 묘하게 친숙했다.
그날 이후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에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었다.
며칠 뒤, 사촌형이 레코드 가게에서 『시네마 천국』 음악테이프를 사왔다. 형이 방을 비운 틈을 타 그 테이프를 카세트 플레이어에 넣었다. 첫 멜로디가 흘러나오자 영화의 장면들이 다시 눈앞에 그려졌다.
그 후로 테이프는 내 방에서 자주 재생되었다. 반복해서 들을수록 카세트테이프 특유의 노이즈가 섞였고, 자주 듣던 부분은 미묘하게 소리가 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멜로디는 이미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가 영사실 구멍을 통해 영화를 훔쳐보던 장면이 내게는 특별했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처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형이 없을 때만 몰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비디오를 보고 되감아 원래 자리에 놓는 것까지가 하나의 의식이었다. 오직 나만의 비밀스러운 시간이었다.
어린 나이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지만, 단순히 이야기가 아닌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빠져들었다. 스크린에 펼쳐진 또 다른 세계, 현실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감정과 경험들이 그곳에 있었다.
대여 딱지가 붙은 비디오테이프는 반납해야 했고, 나중에 내가 산 음악테이프도 시간이 지나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 카세트 플레이어는 쓰이지 않게 되었고, CD와 MP3가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 느꼈던 감정만큼은 지워지지 않았다.
얼마 전, 운전 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시네마 천국』 주제곡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억이 밀려왔다. 몰래 비디오를 재생하던 그 순간, 그리고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시간들.
영화의 마지막 부분, 토토가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 조각들을 보는 장면은 지금도 마음을 울린다. 검열로 인해 잘려나갔던 키스 장면들이 모여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영화 장면이 아니라, 인생에서 놓치고 있던 소중한 순간들에 대한 환기였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첫 자전거를 탔던 날, 대입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첫 고백의 순간, 아이를 처음 안았던 경험, 부모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꼈던 때... 수많은 일상 속에서 이런 특별한 순간들이 우리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된다.
"절대로 돌아오지 마라."
알프레도의 마지막 조언은 언뜻 가혹해 보였다. 하지만그 속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때로는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며, 지나간 날들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제 저녁, 스마트폰으로 『시네마 천국』 OST를 다시 들었다. 카세트테이프 특유의 잡음은 없었지만, 음악이주는 감동은 여전했다. 눈을 감자 사촌형의 테이프를 몰래 꺼내 플레이어에 넣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소년에서 어른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하지만 토토의 마음속에 알프레도가 살아있듯,모리꼬네의 선율도 내 안에 여전히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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