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친구에게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부끄럽다. 항상 두세권 이상을 동시에 읽고 있기 때문에 어떤 책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지만, 500페이지에 달하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라는 건 어딘가 말하기 부끄러운 부분이 있다. 우선 제목부터 좀 부끄럽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라니.
그리고 누가 보아도 철학서라, 펴놓고 있을 때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물론 지금 동시에 읽는 책 중에 <쏟아지는 일 완벽하게 해내는 법>이 있기 때문에 부끄러움 장르는 그쪽에 양보한다면, 이 감정은 머쓱함이랄까.
동시에 읽는 책들은 집안 곳곳과 가방에 들어있다. 이를테면 옷 갈아입는 방에는 또 다른 벽돌 책이 독서대에 페이지가 고정되어 화석처럼 굳어있다.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나면 한두 장 읽거나, 퇴근해서 옷 갈아입다가 서서 읽는 식이다. 거실에 놓여있는 인터뷰 책은 비교적 속도가 빠른 편인데, 너무 예뻐서 거실에 두고 아껴 읽는다.
집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항상 예상치 못한 검문대를 마주하게 된다.
“엄마 같이 읽자!”
무슨 내용인지 물어보기도 하고 왜 읽는지 물어보기도 하는데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같은 경우는 아이가 좋아하는 기차가 표지에 있어서 유독 더 관심을 가지고 결국 ‘같이 읽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어, 이 사람이 기차를 정말 좋아한데. 그래서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글을 쓴 거야.
어 여기 까만 줄 보이지 여기를 이렇게 펴면, 맨 위에 줄에 보이지 스위스다. 어. 여기 엄마 친구 사는데"
이야기의 길을 바꿔보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이상하게 이 책만 잡으면 다리 안쪽에 척하고 와서 앉아 같이 읽으려 든다. <쏟아지는 일 완벽하게 해내는 법>을 왜 읽냐고 물었을 때, “어떻게 하면 일을 빨리 끝내고 집에 와서 우리 아가랑 노는지 알아보려고!” 하니까 정말 입이 동그래지며 눈썹이 한 번 올라가서 “오!”하고 짧게 외치고는 절대 가까이 오지 않겠다는 듯이 거실 반대편으로 갔던 아이가 왜 철학책에는 가까이 오는지. 자꾸 물어보니 ‘소크라테스' 부분은 상세하게 설명해주게 되어버렸다.
“질문을 살아가는 거래"
“오~ 질문을 살아~ 음 ~ 질문을 ~”
이런 모호한 말에도 아이는 멀어지지 않았다. 그제 아침에는 너무 조용해서 아이를 찾아보니 이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아이는 글을 읽는다. 4년 7개월, 내가 읽는 책에 대부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딱히 한글교육을 한 적은 없지만 글을 읽는다. 엄마 말로는 나도 딱 저맘때 세돌 지나면서 혼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엄마가 왜 그 이야기를 38년째 매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굉장히 대견하고 뿌듯하고 고맙다. 가까이 다가가니 다시 엉덩이를 척 들여 앉았다. 무릎 안에 쏙 들어오던 아이는 제법 무릎 밖으로 몸 여기저기가 도드라진다. 항상 사랑해 나의 작은 아이야. 아이는 아주 천천히 한 페이지를 모두 읽었다. 두문장을 읽으면, 다섯 마디에서 열 마디 정도의 내 해설이 붙고 다시 두문장을 읽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한 페이지를 모두 읽었다.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듯이 어린이의 집중력이라는 것은 어른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한 시간의 수업을 이끄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며, 뜻하지 않은 이상한 것에는 네다섯 시간도 줄기차게 달려들 수 있다. 하지만 글을 읽는 일은 엉뚱하게 아이를 끌지도 않고, 비교적 어려운 도전에 속하는 데다 읽고 있는 글 속에는 토끼나 아이들이 뛰지도 않고, 누군가가 똥을 싸거나 괴물로 변하지도 않고, 떼굴떼굴 구르지도 방방 뛰지도 않는데 한 페이지를 모두 지나간 것이다.
아침운동이 끝나면 겨드랑이를 세차게 두드리는 습관을 들이는 중이다. 겨드랑이를 두드리면 혈액순환에 좋고, 독소도 빠지고 그밖에도 무언가 굉장히 좋다고 해서 의식적으로 겨드랑이를 두드린다. 왼쪽 오십 번, 오른쪽 오십 번, 다시 왼쪽 오십 번 오른쪽 오십 번. 어느 아침 짐에서 운동이 끝나고 겨드랑이를 두드리다 문득 웃었다.
“엄마~ 엄마 무슨 소리야?”
아이가 잔뜩 걱정하며 외쳤던 게 떠올랐다. 누가 날 이렇게 걱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한 해가 끝나고 아이는 토끼반에서 반달곰반이 되었다. 토끼반에서는 그동안 했던 활동들을 스크랩북에 넣어 보내주었다. 아이는 클래식도 배웠었고, 가족관계도 배우고, 독립운동도 배웠다. 독서를 배우는 페이지에 글을 기억한다. 책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며, 어린이 여러분은 무슨 글을 읽고 싶나요?
“엄마가 읽는 책을 읽고 싶어요"
한 페이지를 다 읽은 아이를 꼭 안고, 아이의 목소리들을 떠올렸다. 이 페이지를 다 읽은 게 오직 나에 대한 사랑만은 아니겠지. 정말 기차를 좋아하기도 하고, 또 재미없는 철학책이 진짜 취향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이의 사랑을 양껏 받으며 어깨가 뻐근하게 가슴을 쭉 편다. 나도 내 부모를 저렇게 사랑했었을까? 아니 내가 누군가를 저렇게 사랑했던 적이 있을까? 어떤 사랑도 무한하지 않으니까 정해진 양이 있겠지. 언제쯤 끝나게 될까.
언젠가는 이 사랑이 모두 떠날 것을 알고 있다. 엄마 아빠를 떠올리면, 요양원을 떠올린다. 예순이 지나시고는 카카오톡 문자도 안 읽으려고 하는 아빠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가만히 있다가도 줄줄 우는 엄마를 떠올리면 요양원에 가시지 않는 법을 생각한다. 노트북을 선물해 드렸고, 팬데믹 오기 전에는 엄마는 학교에 가시게 등을 떠밀기도 했었다. 내가 부모에게 가지는 마음에 저런 무한의 파스텔톤 사랑은 없다. 무거운 책임감이 놓여 있다.
사랑이 끝날 것을 알고 있다. 사랑이 끝난다고 생각하면 조금 슬프지만, 굳이 끝나는 사랑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할 마음은 없다. 효도라는 말은 아마도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두고 싶었던 누군가가 만든 덫같은 것일 게다. 그럼에도 나 역시 우리 사이에 긴 시간을, 아니 나는 우정을 기대해 본다.
아마도 너는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시간들을 지날 테지. 아빠가 항상 나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네가 겪는 세계는 나는 절대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니가 가장 잘 아는 거야. 너를 믿어"라고 말해줄 양이다. 그리고 잘 이야기해주지 않더라도 자꾸자꾸 남아서 쌓이는 시간들로 너를 열심히 관찰해보려고 한다. 그럼 무슨 일을 겪었는지 조금이라도 짚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옆에서 네가 지나는 시간들을 함께 지나고 싶어.
그러다 문득 니가 정말 너무 힘든날, 나한테 전화를 해준다면 그럼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