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갈빵신도의 어린이날
튀김소영 선생님 책에는 이상적인 ‘어린이 날’이 나온다.
이 어린이날은 굉장히 공적인 날로, 도시 곳곳에서 공식 행사가 열린다. 아이들은 행사일정이 든 팜플렛을 들고 자유롭게 그날의 행사들 중 마음에 드는 걸 선택해서 즐긴다. 이 날은 누구나 모두 공식적으로 그날의 의미를 기억하고 “어린이라는 세계”를 존중하는 법에 대해 배운다. 내가 아는 어린이가 있는가 없는가, 혹은 아이를 키우는가 아닌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텔레비전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이 별도의 편성을 받지 않고, 모두 어린이를 위한 혹은 어린이에 대한 콘텐츠를 다룬다.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작년 이맘때쯤 어린이 주간 코로나 브리핑 특집에서 정중하고 다정하게 어린이 기자단에 질문에 대답해주던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을 떠올리면 된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다정하게 차근차근 탐험하던 튀김소영 선생님은 이 장에서는 양 손을 불끈 쥐고 세상에 도대체 왜 안됩니까를 목놓아 외친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내 책장 2021년 올해의 책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적극적인 강권과 선물공세로 주변에 5명이나 완독 시키고 공치사를 하고 다니는 덕도 있고, 최근에 읽는 모든 책들이 속도가 잘 나지 않는 운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책이 너무너무너무 좋다는 명확한 사실 덕분에 순위가 떨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작가 본인도 아니면서, 편집자도 출판사 홍보팀도 아닌데, 적극적인 포교활동 덕분에 책인사를 받으며 상반기를 보냈다. 그러는 와중에 5월 5일이 와버린 것이다.
어린이 날이라니.
<어린이라는 세계>리커퍼 한정판과 배지가 나오는 쾌거를 이루고 심지어 조르지 않았는데 선물을 받는 특별한 일도 일어났지만, 이번 어린이날 역시 나에게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놀고 싶은 5월의 연휴였다. 시도청에서는 별도의 공식적인 행사가 열리지 않았고, 평소에 틀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텔레비전에서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이 진행된 것 같지는 않다.
꾸준한 포교 활동에서도 도대체 책 어디가 어떻게 좋은지를 구체적인 단어로 만들어내지 못하던 이 나약한 신도는 태양계에 발이 묶인 행성처럼 ‘어린이날' 계획이라고 써놓고는 여의도 IFC몰과 용산 아이파크몰 행사 안내를 따라 돌고 있었다. 궤도를 뜨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려앉지도 못하다 결국에는 그날이 와버린 것이다.
나약한 신도는 3일 전에 파리바게트에 예약해 둔 브레드이발소 초코케이크를 아침 7시에 찾아왔다.
평소보다 천천히 식사를 하게 두고, 평소보다 더 많이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이렇게 막막한 날들이 아이가 태어나고 너무 찾아온다. 정말 끝도 없는 막막함.
들고 온 초코 케이크 상자는 아침배달에서 들통나서 하이라이트가 아니라, 오프닝이 되어 버렸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케이크를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오늘의 일정을 물어오는 아이와 둘이 마주 앉아 다시 이제 뭘 해야 하지.
이럴 줄 알았다면 첫 영화관람을 아껴둘걸 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영화를 예매했다.
별 수 있나, 처음이 가지는 특별함은 없어도 아침에 이 정도 쵸코를 대령했다면 영화도 특별해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오후 3시 영화를 목표로 오전 10시부터 천천히 움직였다. 차로 이동하면 5분이면 도착하는 영화관에 가기 위해 30분의 산책을 기꺼이 하고, 택시 드라이브를 15분 한 뒤 ( 왜 산책을 영화관 반대방향으로 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 영화관에 도착했다. 아직 영화 시작 전까지는 2시간이 남아있었다. 이번에는 집을 등지고 영화관을 지났다. 무려 세 개의 호텔이 용의 모양이라고 주장하는 건물에 들어있는 드래곤시티와 용산전자상가 사이에 거리는 아주 길고 긴 간극이 있다. 20세기 초 미래를 향하던 번화가와 21세기의 번화가를 꿈꾸었으나 팬데믹에 휩쓸린 쓸쓸함이랄까.
어린이날에는 뭘 해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어린이날 어린이에게 뭘 해주고 있을까.
튀김소영선생님이 어린이와 이 날을 보내게 되었다면, 아직 그 장대한 계획이 실현되지 않았으니, 무엇을 하셨을까?
20세기의 번화와 21세기의 당혹을 지나 아이는 잠들고 말았다. 드래곤시티 1층에는 거대한 한입이라는 카페가 있는데, 이름 덕분인지 커피 한잔에 만천원을 받는다. 아이와 단 둘이 호텔에서 근사한 식사를 해볼까 했지만 1층에서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만칠천원의 한 컵 나오는 양파스프를 마셨다. 체크아웃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우리 아이 또래가 있는 가족들이 연이어 지나갔다. 집 앞이라 정말 집 앞에 가는 복장에 나와 달리 아이도 어른도 모두 한껏 멋을 부린 모습으로 사진도 찍고 호텔 패키지에 있었을 것 같은 인형도 들고 지나갔다. 어린이날에는 뭘 해야 하는 걸까. 어린이들도 호텔을 좋아하는 걸까.
영화는 홈씨네마에서 이미 내가 두 차례나 상영했던 옥토넛 불의고리였다.
*영화교육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D+4년 2개월 영유아 영화교육
아이는 벌써 두 번이나 본 영화를 어린이날 선물로 보게 된 것이다. 제대로 확인도 안 한 엄마를 타박이라도 할법한데 굉장히 정중한 영화관람 자세로 영화를 정독했다.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고, 우스운 장면은 한 껏 웃기도 했을것이다. (영화관에서는 내가 잠들어 버렸다. 나 역시도 세 번째 본 영화였다.) 또랑한 눈으로 나오는 아이에게 영화관 직원이 불의고리 포스터가 들어간 퍼즐을 건넸다. 세상 신나게 한 껏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저맘때 어린이날 뭘 했는지 궁금해졌다.
이렇게 어린이 날이 끝나도 되는 걸까. 결국 아이파크몰에 떨어진 유성우는 아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사고, 아이가 좋아할 거 같은 나무비행기 만들기를 같이 했다. 다른 어린이들은 오늘 뭘 했을까.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꾸며진 공간들을 걸으며, 우리는 정말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걸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어린이들은 배워야 할 것들도 배우며 뜻밖에도 '이게 어린이가 좋아하는 것' 따위를 배우게 되는 건 아닐까.
세상에 갑자기 잘 알게 되거나, 잘하게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주 작은 일도 처음이 있고 나서야 다음들이 온다. 낯선 시간을 지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처음으로 옷을 산 날을 기억한다. 열일곱이었고, 엄마아빠 없이 무려 '옷'을 사는 쇼핑은 처음이었다. 친구들과 부평인지 안양인지 의류 지하상가를 두어 시간 돌고 늦은 밤이 되어서 비닐봉투에 보풀이 한껏 일어나기 쉬운 니트들을 사왔었다.
지난주에 샀던 여름니트는 한지사라는 요즘 나오는 새로운 소재였는데, 가을에 입어도 보온도 될 듯하고 통풍도 잘되고 재질도 잘 변하지 않는 니트였다. 직원분의 설명을 납득하고 고민하고 선택하기까지 열일곱에서 서른여덟까지 여러 시간들이 지나갔다. 내 옷장에는 가죽치마와 스팽글 치마까지 있었다. 정말 많은 시간을 지난 거다.
세상에 갑자기 잘 알게 되거나, 잘하게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주 작은 일도 처음이 있고 나서야 다음들이 온다. 낯선 시간을 지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어디에서나 어린이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게 무엇이든 노력이 필요하다. 어린이들의 작은 몸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동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게 무엇이든 알아채고, 노력하고 자세히 들여다봐야 그다음의 일들도 일어난다. 어린이와 같이 살며 보호자를 맡고 있지만, 아직도 이 아이에 대해 모르는 게 많고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당장 ‘엄마'라는 이름을 마르고 닳도록 듣는 내가 이럴진대, 이모, 삼촌, 아저씨, 누나들은 어떨까 싶다.
'엄마'가 되기 전 나에게 그런 시간들을 세상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한다. 막막한 시간을 좀 더 줄 일 수 있지 않았을까.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잘못된 양육을 비롯한 모든 악행은 악의가 아닌 무지에서 나온다. 만약 우리의 실수가 (아이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미칠 영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특정 덕목에 대한 참된 이해는 도덕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P59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