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국이었던 두 나라 도이치와 오스트리아간의 자존심 전쟁
초인플레이션이 불러온 또 다른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 국경에서 가까운 도이치의 바이에른 사람들이 찾아와 물건을 사들였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던 지역이다 보니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어 잘츠부르크에 방문하는 바이에른 사람들은 늘어 갔다. 어지러운 정치 상황으로 여권이 없어도 오갈 수 있는 상황이다 보니 바이에른 사람들이 몰려와 생필품을 구입하는 것은 물론 움직일 수 있는 환자를 데리고 와서 치료하거나 약을 구매했고 고장이 난 자동차를 수리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화폐였던 크로네의 가치가 급락했기 때문이다. 도이치의 화폐였던 1마르크가 잘츠부르크에서 70크로네 가치와 비슷하게 거래되었다.
바이에른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폐가치가 높았던 마르크를 사용하려고 잘츠부르크로 몰려들었다. 거래되는 품목이 늘어나고 물량이 늘어나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이치의 세관이 나서게 된다. 오스트리아에서 생필품을 구매하거나 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게 늘어날 경우 유출되는 마르크화의 액수도 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도이치에서 생산되는 생필품이 팔리지 않기 때문에 생필품을 생산하는 도이치의 기업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런 이유로 도이치의 세관에서는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오는 기차나 차량에 실린 생필품을 비롯한 여러 재화를 모조리 몰수했다. 단속이 강화되자 오스트리아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듯했지만 잠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에른 사람들은 다시 국경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잘츠부르크를 방문해서 여전히 마르크화를 사용했다. 단지 그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들이 마르크화로 소비한 주된 대상은 생필품이 아닌 비어와 같은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화폐가치 하락으로 마르크화의 화폐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아지자 오스트리아의 모든 물건은 저렴해졌고 바이에른 사람들이 즐겼던 비어의 값도 마찬가지였다. 급락하는 크로네의 환율에 바이에른 사람들은 속으로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이런 상황은 주변의 다른 도이치인들에게도 전해졌다. 가족들을 데리고 잘츠부르크를 포함한 오스트리아의 국경 지역에 가서 치료와 수리, 먹고 마시고 쇼핑을 했다. 절제를 모르고 마셔댄 비어로 인해 거리와 골목에서는 많은 도이치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외쳐대는 고성방가가 울렸고 구석에서는 그들이 토해내는 토사물들이 악취를 품어냈다. 잘츠부르크를 비롯해 국경 인근에 사는 오스트리아사람들은 취해 쓰러진 도이치 사람들을 기차나 차량에 실어 보내는 수고를 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사람들은 그들이 더럽힌 거리와 골목을 청소해야 했다. 이런 수고는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역전된다. 갈피를 못 잡던 크로네의 가치가 안정되면서 뒤늦게 발동걸린 마르크화의 급락을 넘은 폭락은 오스트리아사람들에게 바이에른 사람들에게서 받은 대로 갚아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사람들은 자신들이 경험했던 것을 도이치 사람들에게도 경험시켜주기 위해 국경을 넘어 바이에른 일대의 국경도시로 향했다.
당시 도이치는 막대한 배상금을 감당하기 위해 마르크화를 찍어냈고 잉크값이 더 비싸지는 상황까지 맞는다. 수백 퍼센트의 인플레이션을 의미하는 초인플레이션(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사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해서 얻은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낼 능력이 없던 도이치가 화폐를 계속 찍어내면서 물가는 1000배 이상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승하는 물가만큼이나 돈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외화와 재화, 토지 같은 현물의 가치가 상승했다. 토지, 건물 등을 가졌던 소수 자산가만이 부(富)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더 많이 축적할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도이치의 거의 대다수 국민은 빈털터리가 되어 빈부의 격차는 벌어졌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극심해져 사회적인 갈등과 불안이 계속 유지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명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에 따르면 당시 도이치에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 이후에 달걀 하나의 가격은 40억 마르크를 넘나들었다. 길거리의 노숙인도 가파른 물가상승으로 인해 쓰레기가 된 10만 마르크 이상의 지폐를 하수구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신문 한 부의 가격이 7,000마르크, 빵 한 조각의 가격은 800억 마르크, 1,000cc 비어 한 잔의 가격은 2,090억 마르크를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도이치와 오스트리아가 치렀던 사례는 두 나라 모두 전쟁의 패전국이지만 화폐의 가치하락이 시간의 차이를 두고 진행되면서 발생한 화폐 가치의 변동으로 만들어진 해프닝이었다. 아무튼 이로 인해 얼마간의 시간차이를 두고 도이치인들이 오스트리아에서 했던 행동은 오스트리아인들에 의해 도이치에서 재현되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 가끔 언급되는 이 이야기는 비어를 좋아하는 이웃 나라 사이에 벌어졌던 일로 ‘비어전쟁’으로 불리고 있다. 이런 사례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경고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경각심을 주는 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