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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Jul 28. 2023

중세 유럽에서 부자되는 지름길은 성직이었다.

독점이 가져온 폐해-성직의 매관매직

중세에 부를 모을 수 있었던 최고의 직업은 종교인

기독교 사회였던 중세에 성직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지름길였다.     






 313년 2월 밀라노에서 만난 로마의 서쪽을 다스리던 콘스탄티누스와 동쪽을 다스리던 리키니우스는 칙령을 발표한다. 이 하나의 칙령으로 가톨릭(이하 기독교)은 더 이상의 박해와 핍박이라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거기에 하나 더!!! 기독교인에게 위협을 가했거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기 등으로 빼앗은 기독교인의 예배당(이하 교회)이나 재산이 있다면 모두 돌려주어야 했다. 이는 기독교의 중심인 교회가 재산을 가질 수 있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더불어 기독교는 정복지였던 이스라엘의 토속종교에서 벗어나 로마의 종교가 되었다. 324년 7월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로마의 동쪽마저 차지하면서 대제(大帝, Megas, Μέγας)라는 칭호까지 얻는다. 






 로마를 다시 통일한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지원으로 기독교는 전 로마에서 공인된다. 은밀히 진행되던 포교 활동은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었다. 이런 상황은 유럽지역에 기독교가 자리를 잡는 기초를 다지게 된다. 동양에서 전해진 종교이다 보니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박해받던 종교에서 대제국의 공인된 종교가 되었고 시간이 지나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국교로까지 인정되어 당시 유럽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로마가 망하고 유럽을 장악한 것은 게르만이었다. 게르만의 여러 부족은 각각의 나라를 세웠다. 






 그들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졌던 프랑크의 카를대제가 기독교의 수호자임을 자처하자 그의 힘을 통해 빈약했던 교황의 권위를 살리고자 했던 교황은 그에게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고 칭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카를대제와 기독교의 관계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문자를 모른다고 알려진 카를대제는 문자를 알던 교회나 수도원의 수도사를 정복한 모든 지역에 보내 교회와 수도원을 짓도록 했고 수도원이나 교회를 통해 포교 및 주변 지역의 행정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정복지 원주민들에게는 오랜 시간 이어져 오던 토속신앙을 믿지못하도록 했다. 종교의 자유를 없애고 핍박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했다.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서 핍박받던 기독교가 핍박하는 기독교로 거듭난 것이었다. 정복자의 횡포로 생긴 원주민과의 갈등은 저항을 불러왔지만 곧 진압되었다. 유익과 불익을 떠나 프랑크 왕국의 이런 통치 행위가 결국 온 유럽에 기독교가 뿌리내리는 계기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프랑크의 카를대제와 뒤를 이은 왕은 교황과 깊은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의 구약 시기의 기록인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내용에는 베드로의 포교에 감명받아 세례를 받은 시몬(Simon)이라는 마술사가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사도를 보자 자신도 이런 능력을 갖추고 싶은데 얼마의 값을 치르면 되는지 묻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이에 베드로가 화를 내며 마무리되지만 이런 내용을 근거로 종교적인 능력이나 지위를 돈으로 사려는 행위를 모두 ‘시모니(Simony)’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만나 시모니라는 형태가 왕성하게 이뤄지던 시기를 우리는 중세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중세의 로마 가톨릭은 권세를 누리기도 하지만 권세에 맞는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돈도 많이 사용했다. 당시 카놋사의 굴욕에서 알 수 있듯이 중세동안 교황의 권세는 세속의 황제나 왕의 권한에 비해 높았다. 중세의 사상을 장악한 기독교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 그 자체였다. 특히 기독교의 수장이었던 교황의 사치는 그렇기에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개인의 사치스러움은 물론 친인척을 추기경과 대주교로 앉히고 그들에게 많은 성직록(성직자가 받는 급여)을 지급하면서 교황청의 금고를 바닥나게 했다. 역대 교황들의 사치와 ‘뻘(?)짓’으로 재정 지출해야 될 돈이 많아지게 된 교회는 돈을 벌어야 했다. 이를 위해 교황청은 가톨릭의 부패를 상징하는 시모니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교황으로 즉위한 식스토 4세(라: Sixtus PP. IV, 이: Papa Sisto IV, 생애: 1414~1484, 재위: 1471~1484)는 시스티나 성당을 세우고 바티칸의 도서관 확장을 통해 예술과 학문을 장려하여 로마와 이탈리아가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도록 유도한 공적이 있으면서도 교황권이 급속하게 몰락하도록 유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즉위 후 교황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직위인 추기경에 20대였던 두 명의 조카를 곧바로 임명한다. 그리고 지금 가치로 따졌을 때 수십억 원으로 평가되는 성직록을 지급한다. 교황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갖춘 두 젊은 추기경은 자신들이 받은 성직록으로 향응과 방탕, 사치를 시전했다. 이런 행동은 자신들의 이름을 온 유럽에 알리는데 많은 기여를 한다. 추기경은 교회에서 정식으로 서품받은 성직자만이 오를 수 있는 직위이었지만 자신이 교황이었기에 식스토 4세에게는 중요한 절차가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친‧인척을 비롯해 친분이 있거나 돈을 많이 가져온 사람에게는 추기경이나 대주교, 주교의 직위를 주었다. 






 인노첸시오 8세(라: Innocentius PP. VIII, 이: Papa Innocenzo VIII, 생애: 1432~1492, 재위: 1484~1492)도 식스토 4세에 뒤지지 않았다. 교황청에서는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직책을 다양하게 만들어 엄청난 돈을 받고 팔았다. 사람을 죽이고 도망다니는 살인자도 돈만 많이 낸다면 용서를 받으면서 자유도 얻게 되었다. 교회의 성직은 점점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알렉산데르 6세(라: Alexander PP. VI, 이: Papa Alessandro VI, 생애: 1431~1503, 재위: 1492~1503)도 성직을 거래하는 것은 여전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재위를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친인척을 불러와 교회의 주요 직책에 앉힌다. 특히 교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위직의 인기가 높았기에 가격흥정도 제일 많았고 가격도 꽤 높았다.  






 성직이 거래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성직을 비싼 돈을 주고 구입을 하더라도 교회나 수도원에서 나오는 헌금과 십일조, 그 외의 여러 방식을 통해 쓴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에 성직이라는 상품은 공급 못지않게 수요가 꾸준했다. 자리가 거래시장에 나오기가 무섭게 매진되며 완판의 신화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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