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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Jul 29. 2023

지리적인 발견은 곧 부의 창구였다.

지리적인 발견은 곧 부의 창구였다. 






 이베리아를 장악한 카스티야 연합왕국(이하 에스파냐)의 지원에 힘입어 진행한 콜럼버스의 무모(?)한 도전이 지리적인 발견으로 이어지면서 빈곤했던 유럽은 조금씩 사람 사는 동네가 되어갔다. 뒤늦게 유럽의 지분을 획득한 에스파냐의 처지에서는 유럽 내에서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는 것은 어려웠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고민에 몰두하던 찰나에 오류가 가득한 플랜을 가지고 있던 제노바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0. 10. 31 ~ 1507. 5. 20)가 에스파냐에 등장한 것이다.






 최초의 철학자이자 기상학자라고 부르는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BC624 ~ BC545?)는 배를 타고 지중해를 다니면서 관찰한 육지의 모양의 근거로 땅은 가운데가 부풀어 있는 원반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발전시켜 세상의 땅은 둥글다고 주장한 사람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로 불리는 피타고라스(BC570 ~ BC490)다. 이후에도 아리스토텔레스(BC384년 ~ BC322년)가 월식을 통해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은 둥글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시간이 흘러 수학자이자 지리, 천문에 밝았던 에라스토테네스(BC276 ~ BC194)가 이미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상태(당시 46,250km, 실제 둘레는 약 40,009km)였다. 당시 에라스토테네스가 사용한 마일(해상 마일 1,85km)과 페르시아의 지리학자이자 지도제작자로 활동하던 알 파르가니가 사용한 마일(아라비아 마일, 1.8~2.0km)은 콜럼버스가 생각했던 마일(로마 마일, 1.6km)과 달랐다. 이런 오류로 인해 인도에 도착하려고 출발한 여정은 실패와 죽음이 기다리는 항해일 수도 있었지만 신대륙이 콜럼버스 일행의 목숨을 살리고 성공을 보장해준 것이다. 






 지중해 너머 대서양을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신대륙은 콜럼버스 일행과 에스파냐를 위한 접촉사고이자 로또이면서 성공이었지 신대륙에서 살아가던 여러 문명의 원주민에게는 잔잔하던 호수의 돌팔매질이었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면서 살육이 시작되는 재앙이었다. 응고 인자가 적어 작은 출혈도 일반인보다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혈우병 환자처럼 에스파냐 침입으로 인해 당시 신대륙 원주민의 90%가 유럽에서 전해진 질병과 폭력 그리고 강제 노동에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에스파냐는 신대륙을 식민지로 삼아 수탈을 통해 여러 이익을 챙겼다.






 대표적으로 삼각무역을 통한 경제적인 이득과 곳곳에서 원주민의 식재료로 사용되던 채소와 작물은 물론 설탕까지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그와 동시에 유럽에서 화폐와 동일하게 거래되었던 은까지 광산에서 채취해 유입되면서 그야말로 신대륙은 에스파냐에게는 노다지였다.  






 이런 지리적인 발견은 유럽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신대륙의 부와 재화가 에스파냐로 유입되었지만 넘치는 재화와 재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재정 파탄이라는 결과를 맞이해야 했다.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에스파냐 덕분에 주변의 다른 나라가 부(富)를 누렸기 때문이다. 착취와 수탈에만 탁월했던 에스파냐는 결국 유럽이 부유해져가는 과정의 창구였던 셈이다.






 이후 페르디난드 마젤란(1480~1521)이 이끌었던 선단은 중간에 마젤란이 사망하지만 세계 일주를 시도해 성공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세상이 ‘둥글다’와 ‘둥글지 않다’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다. 바스코 다 가마(1460년대~1524)가 발견한 ‘희망봉(1488)’을 포함한 여러 가지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높여가면서 서양이 동양을 앞서가기 위한 발판을 하나씩 만들어갔다. 물론 갑작스럽게 풍요로워진 경제의 이면에는 이런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에스파냐가 부도난다든지 물가가 상승한다든지의 부작용도 있어 피해가 적지 않았다. 






 콜럼버스, 마젤란, 바스코 다 가마 등의 힘겨웠던 도전의 성공을 발판 삼아 서양에서는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와 에스파냐, 잉글랜드, 네덜란드 등을 중심으로 대항해시대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해상세력으로 발돋움하려고 시도했다. 서양의 입장에서는 동양에 각각의 나라에서 세운 동인도회사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에 유럽은 이후에도 북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를 활용해 제국주의로 성장하면서 많은 경제적인 이익을 누렸다. 이런 수탈의 역사에서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날짜를 기념하기 위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는 10월 12일을 휴일로 지정하여 기리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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