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구성원의 참여와 금융시스템으로 만들어진 富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국부(國富)의 유출
자본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이동이 자유롭다. 사람이 못가는 곳은 있어도 자본이 못가는 곳은 없다. 길만 있다면 자본은 세상의 곳곳으로 실시간 이동할 수 있다. 그런 자본이 사람의 이동까지 좌우하고 있다. 최근 고액자산가들의 이민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의 이민은 투자를 기반으로 한다. 투자 이민은 투자자가 이민 가려는 나라에서 요구하는 투자 액수와 기간 등의 조건이 부합되면 투자를 실행해서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민의 필요조건인 투자로 인해 고액자산가들이 우리나라에서 쌓은 부(富)의 일부가 해외로 유출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이유로 투자이민은 가진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이민이라고 알려져 있다.
투자이민과 관련해서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컨설팅업체 ‘헨리 앤 파트너스’라는 곳에서 자신들의 투자이민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자료를 통해 2023년에 타국으로 투자이민을 떠난 고액자산가가 전 세계적으로 증가추세라고 밝혔다. 고액자산가의 순유출이 가장 많은 나라가 중국이라고 했다. 다음으로 인도가 있다. 이어진 순서를 따라가다 보면 7번째에 익숙한 국가명에서 눈길이 멈춘다. 바로 대한민국이다. 컨설팅업체에서 작성한 자료는 달러를 기준으로 유동성 자산 100만 달러(1,383,440,000원, 7.29 환율기준)이상을 가진 자산가가 다른 나라에서 6개월 이상 머무르는 경우를 기준으로 작성한 것이다. 투자이민을 한 우리나라의 고액자산가는 올해에 더욱 늘어나 1만5,200여 명의 중국과 9,500여 명의 잉글랜드, 4,300여 명의 인도에 이어 지금까지 1,200여 명이 타국으로 유출되었다는 내용을 담았다. 자료에서는 우리나라 고액자산가의 수를 세계 15위(10만9,600여 명)라고 분석했다.
투자이민에 대한 내용은 아니지만 이와 관련해서 KB금융경제연구소가 지난 12월에 작성한 ‘한국 부자 보고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최상위층 0.89%(45만6,000여 명, 이하 W집단)는 부동산자산 2,543조 원을 포함해서 약 5,290조 원의 자산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W집단은 대한민국 전체 금융 자산의 59%(약 2,747조 원)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도 금리가 상승하면서 주식 가치가 하락과 채권 가치도 하락하면서 줄어든 금액이기에 이 정도다. 1%도 안 되는 W집단이 보유한 자산이 대한민국 전체금융자산의 60%에 육박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양극화가 어느 정도인지를 명확히 알려주는 지표다.
현금을 포함한 금융자산을 기준으로 이들을 자산가(10~100억 원), 고자산가(100~300억 원), 초고자산가(300억 원 초과)로 구분해서 살펴보자. 자산가는 약 91%(41만 6,000여 명)로 이들이 가진 자산은 38.6%(약 1,061조 원)이다. 고자산가는 약 6.9%(3만2,000여 명)로 자산은 20.3%(약 558조 원)을 소유하고 있다. 초고자산가는 약 1.9%(9,000여 명)로 W집단 전체금융자산 중에서 41.1%(1,128조원)를 소유한 것이다. 초고자산가는 대한민국 전체인구를 감안했을 때 약 0.02%인데 전체금융자산(4,656여조 원)을 기준으로 약 24.2%다. 자원이든 재화든 소수가 다수에 비해 가진 양이 월등히 많을 때에는 사회는 항상 문제를 일으켰다.
이들이 전부 타국으로 투자이민을 가지는 않겠으나 이렇게 극단의 양극화가 벌어진 상황에서 고액자산가의 투자이민을 단순한 일탈이나 개인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로 치부하기에는 알맞지 않다. 그들이 부를 형성하는데 있어 사회구성원이 기여한 부분과 사회시스템인 금융을 활용한 것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스스로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부는 온전히 그들의 것이 아니다. 공익적인 부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부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행정부의 적절한 규제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규제 없이 국가의 부가 유출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행정부가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동안 이뤄온 경제성장의 과실은 사회구성원과 나눠야한다.
그동안 언론에서는 고액자산가들이 해외로 이민을 가는 이유가 과도한 상속세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기득권의 대다수는 W집단에 속한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언론을 통해서 역대 행정부에게 압박을 가하며 상속증여세제의 개정을 요구해왔다. 이에 기득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번 행정부가 2024년 세제개정안으로 화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액자산가가 투자이민으로 주로 선택한 상위권 나라들이 USA,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인 것을 보았을 때 상속세 같은 세금 이외에도 교육에 초점을 둔 투자이민일 가능성이 높다. 캐나다의 경우 상속세가 없으나 상속받은 자산이 25만 캐나다달러(CAD) 이상일 경우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서는 자본이득세를 내는데 최고세율은 66.7%이기 때문이다. 원래 최고세율이 50%였던 자본이득세는 캐나다 정부의 조세수입 확보와 사회적 양극화 해소를 위해 세율이 인상되었다.
언론과 고액자산가들의 주장대로 우리나라의 상속증여세 최고세율은 현재 50%로 일본(55%) 다음으로 높은 편이다. 그렇다고 과도한 세율 인하와 공제액을 급격히 늘려버린 이번 2024 세제개편안이 정당성을 얻는 것은 아니다. 세율을 낮추려면 공제액을 적절한 선에서 조정하거나 유지해야 했고 공제액을 급격히 늘리려면 기존 세율을 유지해야 했다. 국회가 행정부의 몰상식적인 세제 개정을 저지하고 수정하기 위한 충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지금 행정부는 꾸준한 감세정책으로 올해도 역대급 세수 결손을 눈앞에 두고 있다. 행정부의 예산 감소로 이어지며 성장동력이 점점 꺼져가는 시기다. 위기가 왔을 때 서민은 장롱과 서랍을 열어 금을 내놓았다.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공동체라는 동지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W집단은 어떠한가? 이런 때 사회적인 혜택을 누렸던 고액자산가들이 사회적인 책임감 없이 투자이민을 가려 한다면 염치없는 행동이며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몰염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과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정부가 투자이민에 대한 적절한 규제대책을 연구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