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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Vet Jul 08. 2021

캐릭터를 마무리하는 아름다운 방식

영화 <로건>을 보고 끄적였던 글.

영화를 보다가 문득 <아비정전>이 떠올랐다. 날갯짓을 죽기 전까지 멈출 수 없는, 오직 죽었을 때만 땅에 닿는 '발 없는 새'의 이야기가 계속 로건에게 투영됐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세상은 그 목적지가 허상이라고 말하고, 여로의 중간에 만난 안식처는 하룻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한 채 나아가야 하는 그 삶이, 처절함이 너무나도 처연하게 다가왔다.


서부극이란 장르는 프론티어 정신이 그 가치의 기반이란 점이다. '나아간다'는 사실,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그 사실이 서부극의 물성을 형성하고, 감정을 자아내며, '운동성'이란 영화의 본질을 건드린다. <로건>은 ‘늙음’이란 요소를 이런 서부극의 뼈대와 엮으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늙어가는 인물의 이야기는 항상 흥미롭다. 늙어간다는 것은 자기 몸의 주체성을 잃어가는 흐름이고, 자신의 존재 가치가 흐려지는 과정이다. 그 반작용으로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증(自證)하며, 생존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늙어가는 인물들에겐 그런 투쟁의 에너지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의 인생은 서부극과 맞닿게 된다. 서쪽이 황혼의 공간이란 점까지 떠올린다면 늙어가는 인물의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서부극일지도 모르겠다.


<로건>이 서부극의 편린들(TV 속 <셰인>, 말, 카우보이 복장, 극중 공간적 배경 등)을 끌어오며 장르 특유의 서사적 뼈대를 차용하면서 영화의 이미지는 히어로 영화에서 가져오며 더욱 다층적인 서사를 완성한다. 영화는 계속 엑스맨 코믹스(원작 만화)를 프레임 안으로 가져온다. 이건 존재하지 않다거나, 허구일 뿐이라고 끊임없이 인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발화의 주체가 코믹스 속의 존재인 울버린이란 점이다. 자기 부정을 되뇌이면서 생존을 위해 나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흡사 히어로 장르의 자기 증명과 닮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시스템에서 탈출한 후대(X-23)와 함께 시스템 속 자기 복제(X-24)에 대항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로건>은 히어로 장르가, 더 넓게는 예술 자체가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야기이다.


이런 메타적 요소가 가져다 주는 감정 너머에, 영화의 서사 자체가 가져다 주는 감동도 함께 존재한다. 먼슨 가정집에서의 하룻밤 시퀀스를 짚고 넘어가려 한다. 해당 시퀀스는 먼슨 가족을 통해 위로받는 로건의 모습과, 실험실 친구들의 사진을 꺼내며 '가족'이란 안식을 갈망하는 로라의 모습이 교차한다. 둘이 갈망하는 것은 결국 안정이다. 사실 로건이 갈망한 안식은 영화의 초반부터 등장했듯 죽음이다. 로건에게 죽음은 허상이었다. “죽지 않는다”라는 저주로 인해 닿을 수 없는 허구의 안식이었으며, '에덴'이었다. 그랬던 로건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로라에게 가족을 되찾아주고 에덴을 향하게 만든 결말은 이 인물들을 향한 가장 큰 위로이자 안식이다.


'울버린'이란 가치의 종말 뒤에는 '로건'이란 인물만이 남기 때문에 영화의 제목은 <로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가 종말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다음 세대가 희망을 계승하기 때문이다. 로건이 계속 에덴의 존재를 부정할 때 자비에 교수는 "로라에겐 진짜야"라고 말한다. 희망이 허구로 사라지지 않고 실재할 때 그 희망은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결말에서 희망을 품은 다음 세대는 멈추지 않으며 영화에서 멈춘 것은 오직 로건, 죽음이란 안식에 다다른 인물뿐이다. 종말이 희망으로 이어지는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그리며, <로건>은 진정한 위로와 함께 영화적 순간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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