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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Vet Aug 26. 2021

<팜 스프링스> 리뷰

반복을 감내하고, 삶을 살아내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본 글은 웹저널 ‘캐시미어 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팜 스프링스> 스틸컷


레트로풍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미국 남서부처럼 보이는 풍경이 펼쳐진다. 영문 모를 염소도 등장한다. 갑자기 지진이 발생하고 갈라진 틈 사이에서 빛이 새어 나온다. 그러고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에서 깬 연인의 침실로 장면이 넘어간다. 연인은 지인 결혼식에 방문한 상태였고, 남자 ‘나일스’는 멋진 축사를 선보인다. 이에 신부의 언니 ‘세라’는 그에게 관심을 두고, 둘이 달아오른 순간 나일스가 난데없이 화살에 맞는다. ‘로맨틱 코미디’인 줄로만 알고 극장을 찾았던 필자에게 서두의 지진은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영화의 색다른 톤앤매너에 빠지기 시작했다.



화살에 맞은 나일스는 이상한 동굴로 도망치고, 세라는 나일스를 따라 동굴로 들어간다. 어느 순간 잠에서 깬 세라는, 이내 잠에서 깬 뒤 같은 하루가 반복됐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에 놀란 세라는 나일스를 찾아가고, 나일스는 ‘타임루프’에 대해 이야기한다. <팜 스프링스>는 이 지점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타임루프물’은 말 그대로 ‘시간의 고리’, 다시 말해 반복되는 시간 속에 갇힌다는 설정을 기반으로 하는 장르이다. 타임루프물은 변함없이 반복되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영원히 같은 시간에 갇혀버린다’라는 공포와 ‘내일이 오지 않으니 오늘의 자유는 무한하다’라는 쾌락이 양립한다.



<팜 스프링스>는 이런 타임루프물의 장르적 특성을 영리하게 활용한다. 나일스는 이미 루프에 빠진 지 오래되어 반복되는 삶을 체념한 채 즐긴다. 세라는 루프에서 빠져나가려 애쓰지만 이내 체념하고, 나일스와 함께 향락적으로 살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둘은 저 멀리 움직이는 공룡들을 발견하고 낭만에 빠져 전에 끝내지 못했던 사랑을 나눈다. 영화는 이 둘의 관계에 집중하며, 루프 안에서 겪을 법한 복잡한 감정의 결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다음 아침부터 각자가 숨겨온 비밀이 점점 드러나며, 영화의 분위기는 점차 변해간다. 둘은 루프 내 삶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결국, 갈라선다. 이후 세라는 양자역학을 독학하여 루프를 빠져나갈 과학적인 방법을 발견하고, 나일스는 본인이 세라를 진정으로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둘은 재회하고, 세라도 사랑을 고백하며 함께 루프를 탈출한다. 그 후 영화는 둘의 여유로운 모습을 비추고, 저 멀리 보이는 공룡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 결말이다.



현대에서 공룡은 허상과 같다. 영화는 반복되는 루프 속에서 낭만적인 순간에 공룡을 보여주며, 타임루프에 담긴 비현실성을 강조하듯 공룡을 활용한다. 하지만 이내 루프가 끝난 순간에도 공룡은 여전히 실존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공룡이라는 소재로 타임루프 안과 바깥을 연결하며, 루프 내에서 펼쳐진 삶을 향한 다양한 시선, 담론들을 비현실적인 루프 내에 가두지 않고 현실의 영역까지 끌어낸다. 다시 말해 <팜 스프링스>는 비현실적 세계 내에서 다룬 이야기들을 현실적 세계로 끄집어내며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다.



영화는 인물들이 과거의 일에서 정신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들을 비추다, 이내 그 과거를 딛고 나아가는 방식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매듭짓는다. 결국, 타임루프는 영화의 핵심을 담당하면서도 이들이 루프에서 배운 삶의 태도는 (마치 영화 속 공룡처럼) 루프 안팎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이어진다. 영화는 오프닝 곡으로 ‘Forever and Ever’를, 엔딩 곡으로 ‘When The Morning Comes’를 활용했다. 두 곡은 유사한 분위기를 띠면서도 반복되는 루프, 그리고 새 아침이 찾아오는 루프 바깥의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반복되는 권태와 후회하는 과거에 붙들린 일상이더라도, 새 아침과 변화는 계속 다가온다. 그리고 그걸 수용하는 것이, 우리의 삶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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