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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Vet Sep 19. 2021

세계 끝의 아이들

<날씨의 아이>와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세계 끝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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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의 아이>(이하 <날아>)와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이하 <신에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날씨의 아이> 스틸컷

최근에 문득 감정적인 장면이 보고 싶어서 <날아> 끝부분을 다시 봤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한 개인의 감정이 세계를 뒤흔드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 그 간절함이 세상을 ‘뒤집어버리는’ 영화의 후반부를 정말 좋아한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호다카가 히나를 구출한 다음 어떤 이미지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히나의 ‘끊어진’ 목걸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너무 당연하게도 내가 근래 본 다른 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바로 <신에바>이다.


<신에바>의 마지막을 알리는 노래, ‘One Last Kiss’는 어떤 행위 이후에 흘러나온다. 바로 마리가 신지의 목에서 DSS 초커를 제거하는 순간부터다. 두 인물을 옥죄던 목걸이는 어째서, 두 세계의 서로 다른 ‘끝’에서 동일하게 등장하는 걸까? <날아>와 <신에바>에서 히나와 신지는 세계의 주축 혹은 세계 그 자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사성을 지닌다. <날아>에서 히나는 끝없이 비가 내리는 세계에서 비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고, <신에바>를 비롯한 에반게리온 세계관은 신지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와 유사성은 두 인물, 두 세계를 비교하며 되짚어야 할 것이다.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스틸컷

<날아>에서 히나의 존재는 곧 ‘비가 오는 세계’와 동일시된다. ‘비가 오는 세계’는 <날아>라는 작품 내에서 일종의 저주이며, 히나를 희생함으로써 저주가 사라진다는 것이 <날아>를 꿰뚫는 법칙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말을 마주한 다음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왜 이 세계는 존속해야 하는가?”. 근데 이 질문은 흥미롭게도 <신에바>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신에바>의 결말을 보고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이 세계는 끝을 맺어야 하는가?”이기 때문이다.


<신에바>는 <날아>보다 더욱 개인과 세계가 강하게 결부된 세계관을 갖고 있다. 영화 내의 모든 비현실적-초현실적 사건 혹은 세계가 인물의 내면과 동일시되며, <신에바>는 그 세계를 닫고 인물을 성장시키면서 그 세계의 문을 닫는다. ‘One Last Kiss’가 흘러나오기 전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기차의 이미지이다. 기차역의 양쪽을 선로가 나누며 건너편에는 구세대로부터 계속 이어져 온 캐릭터들이, 이편에는 신극장판에서만 등장한 캐릭터 마리와 주인공 신지가 있다. 초커를 해제하자 신지는 더 이상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니며, 구세대와 작별을 고한 두 캐릭터는 손을 맞잡고 기차역을 벗어난다.


<신에바>에서 세계의 희망찬 종말은, 미성숙한 세계를 끝내고 아이가 어른이 되는 순간 찾아온다. 그러니까 <신에바> 세계의 끝을 보기 위해서는 아이가 없어야 한다.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던 암울한-절망적인 세계관, 다시 말해 ‘어른이 되지 못한 인물의 내면’은 결국 타인과 손을 맞잡고 세상을 향해 발을 디디며 끝난다. 물론 소통의 부재와 미성숙함이 아이만의 속성은 아니지만,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나가는 용기는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닌가.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스틸컷

<날아>의 세계를 이야기하기 전에, 두 영화 그리고 두 감독의 근래 작품에 드러나는 하나의 키워드를 얘기해보려 한다. 바로 ‘동일본 대지진’이다. 두 감독은 거대한 재난 이후 이를 반추하는 자의식을 작품 내에 투영해왔다. 신카이 마코토는 <너의 이름은.>을 통해 재난 속 개인들 간의 연결을 조명했고, 안노 히데아키는 지진 이후의 혼란한 시대상을 <에반게리온: Q>와 <신 고지라>에 담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두 감독은 아직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듯 이후의 작품에서도 재난의 이미지를 담았다.


<신에바>는 포스 임팩트란 재난 이후 오염 구역을 정화하며 삶의 터전을 지키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잉여적인) 이야기를 기어코 집어넣는다. 특히 이런 잉여의 부분과 망가진 신지의 심리 회복이 나란히 진행된다는 점에서 <신에바>는, 나아가 신극장판 시리즈의 후반부는 작품 바깥의 재난을 구작의 파괴적 설정들과 엮어 작품 내로 긴밀히 연결하고, 동시에 ‘신지’라는 인물의 미성숙함과 재난을 엮으면서, 이야기를 펼쳐나가고 인물의 성장을 함께하는 영화가 아닐까?


게다가 (구작도 마찬가지지만) 신극장판 세계관에서 ‘임팩트’란 재난은 가부장(의-더 나아간다면 어른 세계의-폭력)으로부터 촉발된다. 결국 신극장판을 정리한다면 가부장(어른)에 의한 세계의 파괴-외부적 재난-인물 내면의 고통과 사회적 단절을 연결 지은 다음 어른 세계(어쩌면 구작 세계)가 가하는 폭력의 종말, 재난 이후의 일상 회복, 인물의 내적 성장을 연결 짓는 작품이 <신에바> 그리고 신극장판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에반게리온이 안노 히데아키 본인의 자의식을 전사하는 작품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신에바>는 재난의 고통을 위무하는 태도, 인물의 성장을 통해 자의식의 투영을 끝내려는 의지가 담긴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신에바>의 세계는 끝나야만 한다.


<날씨의 아이> 스틸컷

재난의 키를 아이가 쥐고 있다는 점, 어른들의 사회 속에서 무력해지는 아이들의 몸부림을 담고 있다는 점 등 <날아>는 <신에바>와 몇몇 공통점을 공유한다. 하지만 세계와 아이 간 상호작용의 양상은 다소 다르다. <신에바>는 재난의 트리거를 쥔 아이가 있지만, 재난을 재촉하는 어른들과 재난을 막으려는 어른들 간의 대립이 담겨 있다. 이와 반대로 <날아> 속 대부분의 어른은 (초래할 결과는 모른 채) 키를 쥔 아이를 통해 재난을 해결하려는 인물들이다.


문제는 재난을 해결할수록 키를 쥔 아이, 히나의 육체는 물화되어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즉 아이의 희생을 통해 보존되는, 기이하고 폭력적인 세계가 <날아>의 세계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빛나는 것은 수직으로 곧추선 빌딩들을 가로질러 뛰고 계단을 뛰며 상승하여 끝내 하늘에 닿는 호다카의 의지이다, 수직으로 시각화된 기성세대의 체계를 헤집어놓고 하늘에서 떨어지며 모든 걸 뒤엎는 파괴력이다. 특히 히나 한 명을 살리며 침수되는 도쿄의 이미지는 결국 끝나지 못하고 지속하는 재난임에도, 정말 아름다웠다.


김병규 평론가는 <날아> 비평(http://m.cine21.com/news/view/?mag_id=94329)에서 “세계에 희망이 없음을 깨닫는 순간에, 그것이 그들의 희망을 보존하는 전제였음을 확인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꿨음을, 그것이 우리의 책임임을 두 사람은 분명히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그러한 경험으로 아이들의 감정에 변형을 가져온다. 아이들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소망이 이루어졌다면, 다음은 살아남은 아이들의 새로운 규칙에 대해 말할 차례다”라고 말하며 글을 매듭지었다. <신에바>가 사회의 성숙에 기대어 재난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영화라면, <날아>는 끝나지 않은 재난 속에서 아이들을 통해 희망을 얘기하는 영화가 아닐까. 한 세계 끝의 아이는 어른이 되어 세계를 닫았고, 다른 세계 끝의 아이는 희망을 지켜내며 (어떻게 되든) 세계를 존속시켰다. 사건 이후의 세계는 이전과 절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은 더 아름다울 것이다.






p.s.

어찌저찌 글을 다 썼는데, 진짜 너무 글이 정신없고, 하고 싶은 얘기도 뒤죽박죽 섞여버렸고, 분명 던져놓고 회수안한 떡밥도 제대로 퇴고하면 있을거고(당장 개인 내면 세계-사회적 재난을 엮는게 어떤 의의가 있는지 다루지도 않은,,,), 내가 뭔 말 하는지도 모른 채로 쓴 부분도 되짚으면 있을거고, 진짜 너무 나이브한 시선으로 글쓴 지점도 있을거고, 진짜 생각할수록 애초에 내가 일본 문화를 깊게 이해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내 능력에 벅찬 기획이었던거 같고,,, 그래도 일단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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