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매체에 담긴 의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가디슈>는 소말리아의 한 대학에 지원 사업을 제공하는 남한의 기념사진 촬영 장면으로 시작한다. 문을 열고 나오는 소말리아 사람들과 차 문을 열고 내리는 남한 사절단, 문을 열자 평화와 연대가 시작된다. 두 집단이 만나 사진을 찍기 위해 셔터를 누르는 순간, "모가디슈"라는 제목과 함께 소말리아로 향하는 비행기가 등장한다. 이때 떠오른 가설은, 앞서 셔터를 누르는(촬영하는) 행위 때문에 <모가디슈>란 영화가 현상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념사진 시퀀스 자체가 일종의 카메라로써 기능하며, 영화 본편은 촬영된 결과물인 셈이다. 즉, <모가디슈>란 영화는 ‘영화’라는 사실과 별개로, 일종의 기록 매체로써 존재한다.
<모가디슈>에 계속 등장하는 여러 기록 매체는 어떤 흥미로운 공통점을 가진다. 매체들에 어떤 의도가 있다면, 그 의도는 전부 실패한다는 점이다. 남한 측이 바레 대통령을 위해 준비한 올림픽 비디오는 강탈당하며 이는 북한 측으로 넘어가지만,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숏은 등장하지 않는다. 강대진 참사관(조인성)은 반군의 사진으로 외신 기자를 구슬려 기사를 내지만, 외교부 장관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반군 측이 각국 대사관에 전달한 아이디드 장군의 성명서는 공관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실패한다. 공격당하는 남한 대사관이 길거리에 재생한 평화 선언 녹음테이프는, 내전의 참극 위를 허망하게 맴돌 뿐이다. 강대진 참사관이 북한 관민들의 전향을 위해 몰래 촬영한 식사 사진은 그 이후로 다시 등장하지 않으며, 급조한 전향서는 불타 사라진다.
이렇게 모든 기록의 재생/재현 시도는 실패하게 되는데, 유일하게 한 매체만이 어떤 기능을 해낸다. 바로 공관 탈출을 위해 차를 감싸는 책이다. 책의 본래 기능은 그 안에 담긴 텍스트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가디슈>에서 그 기능은 무용해진 채, 책이 가지는 물질적인 성격에 기대어 신체를 보호하는 용도로 오용된다. 하지만 그 오용의 성공이 이야기를 진행하고, 인물을 살리고, 영화 안에서 운동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앞선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 <모가디슈> 본편 자체가 기록 매체라는 점, 그렇다면 이 사실은 영화-혹은 영화 바깥-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모가디슈>는 강박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떤 메세지의 주입, 혹은 감정의 고양을 자제한다. 이념의 문제에서는 사안 자체의 비중을 축소하는데다, 남북 양측의 시선을 최대한 동등하게 담으려 한다. 감정적인 측면에서도 흔히 ‘신파’라 부르는 형태의 편집, 음악 등을 최대한 줄이려 애쓴 것이 다분히 드러난다. 다만 영화는 공간이 침범당하는, 공간을 탈출하는 방식으로 영화 내에 끊임 없이 운동을 배치하며, 운동 자체의 역동이 불러일으키는 쾌를 적극 활용하여 관객의 흥미를 러닝타임 내내 유발한다. 이런 영화의 선택과 시도를 조금 과감히 말한다면 ‘기능을 거세한’ 영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모가디슈>는 기록 매체에 담긴 의도의 필연적 실패를 믿으며, 스스로의 기능 제거를 통해 실패의 믿음을 자기 스스로 증명하는 영화인 셈이다.
p.s. 신기하게 <모가디슈>를 보다 보면 자꾸 얘기하고 싶은게 생긴다. 도대체 왠지 모르겠지만… 글 쓸 거리 계속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