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성을 중심으로 바라본 <그린 나이트> 속 순간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0. 시작에 앞서: 사실 이 작품에 대해 각잡고 뭔가 써보려고 했는데, 두 번 보고 나니까 그럴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팍 들었다. 그래서 러프하게 아이디어 스케치를 남기듯 영화를 보고 생각했던 것들을 남겨본다. 논리가 허술하거나, 근거가 빈약하거나, 비약이 심하더라도. (떨어지는 문장력은 덤...)
1. 영화를 보면서 내내 ‘물성’이라는 개념이 맴돌았다. 영화에서 특이하게도, 얼굴을 쓰다듬는-만지는 행위가 반복된다. 존재하는 물체를 만지는 것은 물성을 감각하는 행위다. 여기서 그 대상이 얼굴이라는 점도 흥미로운데, 영화에서 또 반복하는 것은 ‘잘린 목’의 테마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지배하는 가장 큰 요소는 ‘목베기 게임’이다. 도전자를 찾아 온 녹기사, 그에 응하는 가웨인, 그리고 1년 뒤 녹기사에게 목을 내어줘야 하는 그의 운명이 <그린 나이트>를 꿰뚫는다. 그리고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는 가웨인 경이다. 그의 목은 이 이야기를 이끄는 원동력이자, 그 자체로 일종의 퀘스트처럼 존재한다. 내어주기 위해선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에는 그의 얼굴을 만지는 인물들이 꾸준히 등장한다. 연인 에셀(비칸데르)부터, 마녀이자 왕의 여동생인 그의 어머니, 왕, 약탈꾼(케오건), 성주(에저튼)와 그 여주인(비칸데르) 등… 과감하게 이야기한다면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건 예견된 부재(목베기 게임을 통한 머리의 상실-부재)가 일으키는 긴장을 극대화하는 행위가 아닐까.
그리고 목베기-물성의 테마는 성 위니프레드와 대비를 이루며 더 두드러진다. 위니프레드는 영화에서 유령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이를 명확히 보여주듯 위니프레드는 ‘손대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물성이 없는 존재를 만지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주고받은 지인께서 CG 기반의 캐릭터가 가지는 디지털적인 성질을 비(非)-물성으로 이야기하셨는데, 실제로 CG의 존재인 거인, 여우 등은 가웨인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웠던게 여우와 거인의 소통, 그리고 “마법이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여우였다. 특히 후자는 본인의 비물질적인 면모를 부정하려는 시도처럼 다가왔달까)
이때 가장 중요해지는 인물은 당연하게도 녹기사이다. 영화가 녹기사를 담는 방식이 꽤 흥미로웠다. 결말과 목 베는 장면을 제외하면 녹기사는 항상 빛을 등지는 역광 상태로 등장한다(심지어 가웨인이 야생 버섯을 먹고 본 환각마저도 빛(번개)을 등지고 있다). 그의 모습이 불러 일으키는 신비감도 있지만, 그림자에 가려지는 인상은 그의 존재가 물질적인지 비물질적인지를 분간하기 힘들게 만든다. 실제로 그의 외양은 CG가 아닌 분장이지만, 목이 잘려도 살아있는 그의 모습은 분명 CG임이 자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분명하게 빛을 받는 두 장면은 어떠한가. 목을 베는 장면은 CG화 된다는 점에서 물성을 포기하는 존재가 됨을 택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결말이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영화는 두 가지 결말을 보여준다. 도망치는 가웨인, 그리고 감내하는 가웨인. 이때 영화는 노란 하늘과 평범한 하늘로 공간을 달리 보여주며, 전자에선 녹기사가 빛을 등지게 하고 후자에선 녹기사에게 빛을 비춘다. 여기서 후자의 장면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인자한 표정이 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그 분장의 물성이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얼굴의 물성을 살리면서, 부드럽게 감각하는 행위. 영화의 결말이 내게 그토록 아름다웠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궁극적으로 물성이 일으키는 정동(情動)은 영화의 제목으로 완성된다. 영화는 중간중간 챕터를 나누듯 소제목을 단독으로-혹은 화면 위에 얹어 보여준다. 이 제목은 영화 내 요소들과 분명 이질적인 성질을 가진다. “가웨인 경과…”는 그 자체를 여러 폰트로 보여주며, 그 외의 소제목들도 각기 다른 폰트로 등장한다. 이 폰트 자체도 디지털적인 성질이 있단 점을 생각한다면, 영화의 맨 마지막에서 <그린 나이트>란 제목이 그루터기에 새겨져 있는, 그 홀로 물성을 갖고 존재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2. 계속 빛을 언급했는데, 영화가 공간-빛을 활용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스파이의 아내>가 떠올랐다. 두 영화 모두 공간의 내부에서 창은 항상 빛으로 가득 차있어 그 바깥 세계를 볼 수 없는데다 야외에서마저 하늘은 항상 흐린 날씨, 구름, 안개 혹은 빛으로 뒤덮여 명확한 실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때때로 광활한 자연을 보여주면서도 결국 갇혀 있는 이미지로 귀결된다. 이를 모종의 공연장(무대)처럼 생각한다면 바쟁이 연극-영화 파트에서 언급했던 ‘무대 커튼의 기적’(연극의 막이 올라가면 그 인위적인 양상을 오히려 관객이 더 쉽게 믿는 상황)을 실현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
3. 공간의 얘기도 해보자면, 영화가 내부-외부를 구분한다는 인상이 무척 강했다. 특히 그 인상을 심어준 건 영화의 오프닝이다. 영화는 궁 내에 서 있는 가웨인에게 왕관을 씌우고, 내부에서 바깥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며 시작한다. 그다음 난데없이 가축들이 있는 숏과 눈 내리는 하늘을 몇 번 교차하면서 보여준다. 그 뒤 화면 끝에 있던 문이 열리면서 기사와 여자가 들어오고, 여자를 말에 태운 뒤 나서려는 순간 카메라는 바깥에서 공간 내부로 들어오며 누워 있는 가웨인을 비춘다.
외부 공간에서 카메라가 내부 공간으로 이동하기도 했지만, 그 카메라의 움직임과 바깥의 기사-여자 이미지 그리고 가웨인을 연결짓는다면 이 장면이 (내부 공간 속 존재인) 가웨인이 꾸는 꿈(외부 공간-기사와 여자의 모습)처럼 다가왔다. 이야기가 개인을 존립시키는 세계에서, 아직 기사가 아닌 가웨인이 기사의 꿈을 꾸는견 그의 욕망이 투여된 것이 아닐까(이후 5번에서 내용 계속).
4. 영화 내내 공간-빛을 활용하는 이미지들이 인상깊었다. 실내에서 창문-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사이에 두고 각각 반대편에서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의 구도라든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얼굴로 가리는 숏들이라든지. 특히 후자는 앞서 1번 항목에서 언급한 얼굴(목)의 물성과 함께 생각한다면 얼굴의 존재를 더욱 부각하는 숏이 아닐까. 그리고 이 숏을 뇌리에 각인시키는 시퀀스가 있었는데, 바로 여주인의 가웨인 초상화-사진 장면이다.
영화에선 흥미롭게도, 초상화라 쓰고 사진이라 읽는 뭔가를 만드는 장면을 보여준다. 창밖의 빛이 가웨인의 얼굴을 거친 다음, 현상되는 캔버스에 반사될 때 그 얼굴이 각인되는 메커니즘으로 사진이 완성된다. 이 메커니즘을, 얼굴이 창문 바깥 빛을 가리는 다른 장면들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 숏들은, 외재 공간의 빛을 통해 인물들의 얼굴을 관객의 얼굴 위에 인화하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이를 통해 인물의 감정을 전이하는 것은 아닐까.
5. <그린 나이트>에서 ‘이야기’는 중요하다. 영화는 맨 처음부터 나레이션으로 왕이 아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이는 위대한 역사로 남을 거라고 말한다. 근데 영화를 두 번째 볼때는 이 장면이 단순한 예언보다는, 마치 저주처럼 다가왔다. 그 지난한 과정들을 밟아가야 할 가웨인, 그리고 그 가웨인에게 씌워지는 왕관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 그 ‘위대한 역사’가 과연 위대한가? 싶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연회에서 왕은 가웨인에게 “내가 너를 너무 몰랐다”고 후회하며, 선물로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그러자 가웨인은 “해드릴 이야기가 없다”고 답한다. 왕궁에서 이야기, 다시 말해 무용담은 ‘기사’를 존립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왕은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다면 이 공간에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가웨인이 아직 기사가 아닌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어머니는 어느 미지의 공간에서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녹기사의 게임과 그 전설을 적은 예언서가 불탈 때, 굉음과 함께 문이 열리며 녹기사가 나타난다. 이때 영화는 녹기사를 외적으로 구성하는 인간의 뼈대, 나무 등을 조합하는 숏들을 비추며 "녹기사는 그 순간 창조된 존재"라고 말한다. 근데 나는 여기서 단순히 녹기사 전체가 아닌, 녹기사의 그 위악스러움과 압도감만이 창조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마녀가 적은 편지와 녹기사가 적은 편지는 겉으로 동일해 보이나 앞의 것이 불탔기 때문에 둘이 온전히 동일한지는 확인할 수 없는 것처럼, 녹기사의 본질과 예언서로 읽은 이야기 속 녹기사의 존재가 온전히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녹기사의 본질은 알 수 없고, 다만 녹기사-왕비 목소리의 중첩으로 읽어나가는 이야기가 새롭게 창조된 녹기사의 존재라는 것이다. 불탄다는 것을 물성의 상실로 본다면, 앞서 언급했던 물질/비물질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녹기사의 존재가 더 명료해진다. 결국 물성을 상실한 이야기를 따라간 가웨인과, 끝내 허리띠의 마법(이라는 비물질적 요소-나아가 '이야기가 있는 기사'라는 종속)에서 벗어나 물성을 되찾은 가웨인이 만나는 녹기사는 각각 달라지는 것이다. 계속 “기사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던 가웨인에게 “나의 기사”라고 이야기하는 녹기사의 모습에서, 관객은 가웨인이 끝내 (물성 없는, 기사가 되게 해주는 이야기가 아닌) 물질적인 (자신만의) 이야기를 얻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6. 언급했던 내용들을 좀 아울러 보면서, A24 측에서 영화를 소재로 보드게임을 만들었다는 점까지 상기한다면 <그린 나이트>는 게임적인 영화가 아닐까? 싶다. 게임은 규칙이 있어야 한다. 영화는 녹기사의 게임을 토대로 교환(혹은 거래)의 원칙을 영화 곳곳에서 적용한다. 길을 알려주고 대가를 요구하는 약탈꾼, 위니프레드에게 그럼 무슨 대가를 줄 것이냐 묻는 가웨인, 획득물 교환을 대놓고 제안하는 성주 등등. 영화는 어떤 교환의 규칙을 제안한다. 이 규칙에는 책임감, 인간성 등등의 이유를 갖다 댈 수 있겠지만, 그 안에 어떤 함의가 있다기보단 세계를 구성하는 기틀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세계에서 마주하는 여러 인물은 일종의 NPC같다는 인상도 받았다. 마주쳐서 상호작용하는 순간, 온전한 설명이 결여된 개인의 이야기가 발현되기 때문이다. 왕은 빈자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고 그 자리를 가웨인에게 건네고, 약탈꾼은 어떤 전투인지 알려주지 않은 채 다만 자신의 형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위니프레드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을 보냈는지 이야기하지 않지만 가웨인에게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냐 묻는다. 이들과의 대화 자체가 모종의 규칙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한 반복되는 ‘리스폰’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가웨인은 여정의 초반, 약탈꾼에게 가진 것과 여정 자체를 뺏긴다(약탈꾼은 그의 외양을 훔치며 심지어 “내가 너의 여행을 끝낸다”고 이야기한다). 360도 패닝 이후 관객에게 제시되는 죽음의 이미지, 그다음 이어지는 역패닝 후 숨쉬는 가웨인의 이미지, 이 두 쇼트의 연속은 마치 게임 속 리스폰처럼 보인다. 무슨 영문인지 위니프레드 집에 돌아와 있는 도끼도, 여주인이 돌려준 녹색 허리띠도, 녹색 예배당에서 도망쳐 나오면서 다시 만난 말도 모종의 아이템 리스폰처럼 다가왔다.
7. 요즘 여러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서 얼굴이 보여주는 힘을 믿게 된다. <스나이더컷>에서 플래쉬의 얼굴이, <루카>에서 마지막 루카의 모습이, <피닉스>에서 니나 호스의 얼굴이, 그리고 <그린 나이트>에서 가웨인과 녹기사의 얼굴이 그랬다. 회피하여 생존할 때 마주할 자신의 모습 대신 죽음을 감내한 가웨인의 얼굴, 그 모든 걸 포용하는 녹기사의 인자한 얼굴. 그 둘의 얼굴이 주는 감정이 너무 강렬했다.
8. 글을 마무리하며: 사실 하고 싶은 얘기들이 너무 많다. 여러 숏들의 구성이나 편집, 여주인이 언급한 적색-녹색의 관계성(그 직후에 삽입된 야외 복도 숏)과 그걸 토대로 분석할 수 있는 여러 장면, 카메라워크, 뒤집힌 가웨인의 이미지(연못 잠수, 거인 평야, 사진 등), 반복되는 횡적 이동의 이미지, 비칸데르의 두 얼굴(솔직히 아사코 생각났음…ㅋㅋㅋ), 가웨인이 기사로 호명되는-그리고 그걸 부정하는-순간들, 도망친 가웨인의 이야기(이때 촬영도 렌즈를 주변이 뿌얘지는 특수 렌즈 활용), 눈을 가리는 마녀 그리고 성주의 시종, 여주인의 책(자신이 이야기를 고치기도 한다는 언급), 두 초상화의 차이, 방울 목걸이, 기사와 명예에 관한 이야기 장면, 여우의 목소리, 영화를 둘러싼 액체의 감각(오프닝에서 창문 옆으로 떨어지는 물, 피, 안개, 연못, 예배당에서 흐르는 물 등), 챕터별 분석 등등… 이거 다 정리하려면 답이 없을 것 같아서 글은 여기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