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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Vet Aug 10. 2021

<모가디슈>와 액체성?

이론비평 ‘액체적 영화에 관하여’에 영감을 받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가디슈> 스틸컷

※ 먼저 이 글은 분명 김병규 평론가의 이론비평 ‘액체적 영화에 관하여’에 영감을 받았지만, 해당 글 속 개념과 정확히 일치하는 방향으로 쓰는 글이 아님을 밝힌다. 김병규 평론가가 내 글을 읽을리도 없거니와, 도리어 읽으면 부끄러울 것 같다.




<모가디슈> 지배하는 주된 정념  하나는 뚫는/뚫리는 감각이다. 영화는 외재하는 공포가 내부에 침습하는 방식의 운동성을 갖고 있다. 이런 운동성은 "공간에서 탈출해야 한다"라는 영화  인물들의 목표와 맞물리며 긴장을 자아낸다. 특히 대부분 운동이 외부->내부의 방향성을 띄며 '뚫리는' 공포를 극대화 하는 와중, (  모두 전달에 실패하지만) 평화의 메세지 방송과 차창을 통해 전달하려  백기처럼 내부->외부의 방향성으로 '뚫는' 이미지를 통해 연대의 시도를 더욱 극적으로 비추기도 한다.


여기서 문득 들었던 생각은 이 운동이 고정적이고 고체적인 특질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액체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닐까 하는 인상이었다. 영화에서 주된 이동은 대부분 속해 있던 공간이 파괴되면서, 내부에 담겨 있던 액체가 흘러나오듯 이뤄진다. 강도들이 총으로 위협하자 남한 대사의 차에서 외교관이 흘러나오고, 피 흘리던 반군 운전기사는 피를 묻히며 공간에 침범하지만 이내 자신의 발걸음으로 공간의 바깥으로 흘러나가 죽는다.


특히 이런 액체성을 특히 부각하는 순간이 두 군데 있었는데, 바로 아나모픽 렌즈 활용 장면과 바닷가 장면이었다. 대사관이 반군 무리에 의해 뚫린 후 북한 관민들은 중국 대사관이란 목표를 향해 흐르지만 이내 저지당하고, 남한 대사관에 당도한다. 그리고 대사관 벽을 두고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쇼트가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초점이 담장 밖과 안을 오가며 이동하는데, 이때 아나모픽 렌즈의 활용 때문에 발생하는 울렁임이 액체적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분리된 내외를 통과하는 카메라란 점에서 이 액체성은 더욱 부각된다.


또 다른 요소는 바로 바다다. 영화는 외재하는 공포가 내부로 밀려드는 이야기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립된 공간을 빠져나가는 액체들의 이야기기도 하다. 이를 강조하는 요소가 바로 바다다. 영화는 두 개의 대립쌍으로 바다의 모습을 비춘다. 첫 대립쌍은 영화의 제목이 등장하며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장면과 마지막에 모가디슈를 탈출하며 비행기의 창밖으로 바다를 내다보는 장면이다. 바다에서 내륙(고립된 공간)으로 흘러들어오는 비행기와 역방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의 대립쌍인 셈이다.


나머지 대립쌍은 (다소 해석주의에 빠지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태준기 참사(구교환) 개인의 바다다. 태준기의 첫 등장은 바닷가다. 모래사장에서 모가디슈 현지 아이들이 뛰놀고, 조금 안쪽에서 밀거래하는 참사의 모습이 뒤이어 등장한다. 이와 대립쌍을 이루는 바다 장면은 태준기가 죽는 순간이다. 앞이 탁 트여 있어 바다가 보이는 이탈리아 대사관 앞에서 태준기가 죽을 때, 그 순간에 바다의 소리가 밀려들어온다.


이때 흥미로운 지점은 카메라가 내륙에서 바다를 향하는, 공간에 갇혀 있는 자의 시선이란 점이다. 대립쌍이 다름 아닌 죽음의 장면임을 생각한다면, 이미 첫 등장의 순간부터 그의 죽음은 암시된 걸지도 모른다. 이미 공간 안에 고립된 인물이자 최후에는 대사관이란 공간으로 침투하지 못한(죽어서야 도달한), 결국 모가디슈라는 공간 밖으로 흐르지 못한 인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모가디슈>의 액체성은 어떤 효과를 불러오는가? 김병규 평론가는 액체적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며 “물소리라는 외재음을 통해 화면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노출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모가디슈에서 가시화된 세계는 반군과 정부의 내란이 펼쳐지는 전장이다. 그렇다면 이 액체성을 통해 스며드는 다른 세계는 무엇일까? 한국 역사 중 군부 독재의 세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물론 이를 완벽하게 일대일 대응할 수는 없는데, 우리나라 군사 정부와 일반 시민 탄압의 관계가 모가디슈 내전의 정부군-반’군’ 사이에 성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정 장면이 두 세계의 상관관계를 담보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대사관 앞에서 반군과 정부군이 대치하는 와중, 남한 대사관에서 스피커를 통해 평화의사를 전달하는 녹음을 방송한다. 이때 영화는 사운드 위에 탄압당하고 학살당하는 반군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이 녹음은 대사관이라는 닫힌 공간 내에서 밖을 향해 능동적으로 낸 구멍이며, 이 카세트 녹음은 액체처럼 그 구멍을 통해 흘러나온다. 이때 대사관이 한국령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액체는 남한에서 모가디슈에 스며들고 있는 셈이다. 결국 영화 내 인물들이 꾸준히 언급하는 안기부와 독재의 잔상은 스피커라는 구멍을 통해 모가디슈로 흘러들어간다. 화면 바깥의 세계가 가상의 작품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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