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카메라는 물리적 방향성을 통해 시공간적 변화를 담아내고, 어떤 이미지를 보여줄지 결정하는 인지적 방향성을 통해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변화를 포착한다. 임대형 감독의 두 장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6)와 <윤희에게>(2019)에선 제목이 시작과 끝, 이렇게 두 번 등장한다. 마지막에 제목이 다시 등장할 때, 시작과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 글은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방향성으로 그 변화를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방향성은 시간의 개념을 내포한다
우리가 횡적으로 ‘순행’이라 인지하는 방향은 보통 좌에서 우로 이동하는 방향이다. 이런 횡적 이동은 어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공간의 전환이기도, 그 이미지를 통해 발생하는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이기도 하다. 시점이 현재더라도 이동을 통해, 과거의 이야기를 간직한 대상을 향한 감정적인 시간의 흐름을 담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인물(혹은 카메라가)의 방향성에서 발생하는 공간의 차이, 시간의 변화는 그 자체로 어떤 목적이나 감정을 대변한다. 임대형 감독은 이런 방향성을 통해 관객에게 ‘과거’라는 존재를 체험하도록 한다. ‘과거’라는 표현은 단순히 시간,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과거 인물의 경험과 연결된 공간도 ‘과거’라는 범주 안에 있다.
임대형 감독은 이은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과거지향적인 사람”이라 이야기한 바 있다. 그의 두 장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와 <윤희에게> 모두 과거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관객은 인물의 과거를 모른다. 그래서 임대형 감독은 인물들을 계속 이동시키며 전사를 추리하듯, 퍼즐을 풀어가듯 차츰차츰 인물의 조각을 모아 완성해간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영화 모두 플래시백이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를 모르지만, 과거를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살아온 시간의 기록을 직접 볼 수 없다면 그 순간의 파편인 일기 혹은 사진을 보거나,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의 영화 두 편은 모두 과거의 기록을 계속해서 들춰보고, 현재를 기록으로 남기고, 돌아보는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의 영화에서 카메라가 중요한 이유, 이동한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뒤돌아본다는 것, 영화를 찍는다는 것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주)인디스토리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이하 <미스터모>)는 아내를 떠나 보낸, 영화감독을 아들로 둔, 위암에 걸린 이발사의 이야기이다. 첫 챕터의 제목이 뜬 다음 곧바로 붙는 컷은 좌에서 우로, 즉 순행의 방향으로 걸어가는 주인공 ‘모금산’의 쇼트이다. 그는 계속 나아가는 인물이다. 걷는 동안 자전거를 탄 소년이 인사를 건네지만 크게 화답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만 집중한다. 수영장에서 친해진 ‘자영’을 바래다주고 떠나는 길에도 자영의 인사에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자영이 길에서 갑자기 다육이를 건네며 깜짝 선물을 건네도 무시하고 나아간다. 금산이 양복점에서 양복을 찾아 이발소로 향할 때도 아들 ‘스데반’은 그의 등만을 바라본다. 스데반이 금산의 옛 연인 ‘연정’에게 영화 상영회 초대장을 건넬 때도, 연정은 멀어지는 금산(이 탄 차)의 뒷면만을 바라본다. 금산은 혼자 나아가고,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후회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후회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의심하지 않고, 또 주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선택을 의심하고 판단을 주저하는 순간부터, 그 의심과 주저는 후회로 자라난다. 의심과 주저를 하지 않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법은 도망치는 것이다. 이때 모든 질문과 상황에 대해 유보적으로 반응하며 이 도망자의 역할을 대행하는 것은 영화의 카메라이다. 이발하러 온 아이에게 금산이 “넌 커서 뭐하고 싶니”라 묻고 아이가 “아저씨는요?”라고 되묻자 카메라는 도망가서 이발관 바깥에서 이발관을 멀찍이 비춘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스데반의 연인 ‘예원’이 금산에게 “이제는 (스데반에게 위암에 대해) 말씀하셔야죠”라 얘기하자 카메라는 도망가서 익스트림 롱 쇼트로 세 인물을 잡는다. 차 안에서 예원이 “그분하고는 어떡하다 헤어지셨어요”라 묻자 “불꽃이 꺼진 거지 뭐”라 말하며 명확한 대답을 회피한다. 그 뒤 카메라는 다시 멀리 빠진다. 기어코 도망가는 카메라에선 의지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모든 의지에도 불구하고 사실 금산은 계속해서 뒤돌아보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그를 둘러싼 사물과 공간들은 전부 과거의 산물이다. 뚱뚱한 브라운관 TV, 옛날 달력, 외날 면도기, 이발관, 다방의 계란 올린 쌍화차, 오래된 치킨집, 양복점처럼. 그리고 그의 일상은 이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달력, 침대, 시계, 면도하는 모습 등 자꾸 반복되는 쇼트가 첫 챕터, ‘일상’에서 두드러지는 이유기도 하다. 그가 계속 나아가는 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트레드밀 위의 삶이다. 그가 자주 가는 치킨집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자리는 벽 앞이다. 뒤돌아볼 곳만 남은,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는 벽 앞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그가 쓴 과거의 기록들을 되짚고, 옛날 비디오를 돌려보고, 꾸역꾸역 강냉이를 삼키며 공허함을 채우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그랬던 금산이, 영화를 찍기 시작하면서 뒤돌아보기 시작한다.
이런 ‘뒤돌아보는 이미지가’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모금산이 서울에서 살았던 곳을 보이스 오버 나레이션과 함께 나열하는 씬이다. 여러 지역의 컷을 일련의 몽타주로 엮는 동안, 카메라는 역방향(우->좌)으로 계속 움직이며 과거를 되짚는다. 그리고 그 도착점은 금산의 옛 연인, 스데반의 친모 연정이다. 그 후 도심 곳곳에서 영화 촬영을 하는 3인방의 씬이 차례로 이어지고,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할 선향불꽃 장면을 촬영하는 씬에 다다른다. 이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영화의 상당 부분 움직이는 피사체를 따라가기 위해 쓰인 레일캠이 정지된 피사체 사이를 움직였다는 점이다. 선향불꽃을 들고 있는 스데반과 등을 기댄 금산부터 시작해 카메라와 예원에게 다다르는 레일캠은 순행(좌->우)으로 움직인다. 그 뒤 곧바로 카메라에 잡히고 있는 금산의 모습, 곧 영화가 될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이 씬은 영화라는 것이 과거(금산)의 시간을 현재(예원 혹은 카메라)에 아로새기는 과정임을, 그렇게 촬영된 결과물(영화)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임대형 감독에겐 영화 자체가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이다. 자전거를 타던 소년이 뒤돌아봤을 때, 금산이 거울을 보다 뒤돌아보곤 춤을 춘 건 영화가 되려는 몸부림이다. <미스터모>의 결말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제 <윤희에게>를 살펴보려 한다.
뒤돌아보는 것과 카메라
<윤희에게>의 시작도 역행하는 기차로 시작한다. 이 기차가 다시 등장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쇼트의 존재는 다소 당황스럽다. 이 쇼트 다음에 곧장 어딘가 도착하는 인물도 없고, 해당 쇼트 뒤에 다른 기차가 매치 컷으로 붙지도 않고, 다만 ‘쥰’이 쓴 편지를 고모 ‘마사코’가 발견하는 씬이 뒤따른다. 그렇게 과거로 역행하여 닿은 곳은 쥰의 방, 누군가의 과거와 맞닿아 있다. 이런 시작은 <윤희에게> 또한 첫 쇼트를 통해 과거를 되짚는 이야기란 사실을 방증한다. 책상 위 부치지 못한 편지를 마사코가 발견한다. 마사코가 편지에 써진 이름 ‘윤희’를 되뇐다. 눈이 내리는 마을, 마사코가 걸어간다. 우체통을 스쳐 지나갔다가, 문득 생각이 바뀌었는지 뒤돌아서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다. <윤희에게>에선 이처럼 한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다시 역행해서 돌아오는 이미지가 산재한다. ‘새봄’이 쥰의 집 앞에서 길을 헷갈렸을 때, 윤희가 걸어가다 취객의 이야기를 듣고 달을 바라볼 때, 그리고 오타루 시계탑 앞에서 윤희가 쥰을 지나쳤을 때처럼. 앞선 <미스터모>가 돌아보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서사였다면 <윤희에게>는 인물들이 자꾸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이동하던 인물이 방향을 뒤집는 데에는, 뒤돌아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놓친 것을 바라보기 위해, 혹은 다른 인물의 존재를 감각할 때. 전자가 과거, 시간과 관련이 있는 움직임이라면 후자는 시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먼저 두 이유를 연결한다면, <윤희에게>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과거가 인물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시선을 생각했을 때 <윤희에게>에서 발견 가능한 이미지는 염탐하는 인물들이다. 상대가 관찰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관찰자를 보여주는 행위. 마사코의 가게를 염탐하는 새봄과 ‘경수’, 쥰의 집을 몰래 바라보는 윤희, 새봄의 통화를 엿보는 마사코처럼. 시선으로 인물을 부르는 행위, 얼굴로 대변되는 진실 혹은 감정을 들여다보려는 이 행위는 흡사 촬영을 하는 카메라와 같다. 다시 카메라의 문제다.
<윤희에게> 속 카메라와 <미스터모>의 카메라는 둘 다 과거를 기록한다는 점에서, 특히 둘 다 바라보는 대상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앞서 말했듯 <미스터모>와 <윤희에게> 모두 플래시백 없이, 중심인물의 과거를 관객과 주변 인물이 모르는 상태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미스터모>에서 금산은 자신이 과거에 살았던 공간들을 배경으로 자신이 찍는 영화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를 구성하며, 그 과정에서 관객과 주변 인물은 금산의 전사를 하나씩 알아간다. <윤희에게> 속 카메라(혹은 카메라-유사 이미지) 또한 알지 못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데에 쓰인다. 염탐의 이미지는 항상 주체가 알지 못하며 궁금해하는 인물들을 향해 있다. 새봄이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고 말하며 유일하게 찍은 인물이 윤희란 점은, 동시에 새봄에게 궁금한 인물이 윤희뿐이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것을 향한 카메라의 방향성은, 인물을 향한 시선에서 시작되어 카메라(혹은 눈)의 ‘깜빡임’을 통해 확장된다. 카메라의 깜빡임은 언제 눈을 감고 눈을 뜨느냐의 문제, 결국 ‘무엇을 보여 주느냐’의 문제로 직결된다. 카메라의 깜빡임은 인지적인 방향성을 보여주는 수단이다.
카메라의 깜빡임, 페이드와 암전
카메라의 깜빡임은 페이드와 암전 쇼트(편의상 꺼진 화면이 별다른 기법 없이 컷으로 곧장 붙는 쇼트를 ‘암전 쇼트/암전되다’라 칭하고, 일반적인 컷 편집과 구분하겠다)를 통해 표현된다. 그리고 임대형 감독은 페이드와 암전 쇼트를 최대한 절제하며 기법이 불러오는 효과를 극대화한다. 임대형 감독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장면 전환의 컷 편집이다. 고집스럽게도 임대형 감독은 대부분의 장면 전환을 컷으로 처리한다. 디졸브, 플래시백 등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그나마 인서트, 포커스 인/아웃 정도를 사용할 뿐이다. 그리고 이제 드물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페이드-인/아웃과 암전 쇼트이다. 먼저 장면 전환 자체도 단순하지만, 임대형 감독의 영화들은 보통 암전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필자가 현재까지 관람한 임대형 감독의 영화는 <미스터모>, <윤희에게>와 단편 <만일의 세계>(2014)인데 세 작품 모두 암전 쇼트, 페이드의 희소성이란 특징이 두드러진다. 특히 <만일의 세계>에는 페이드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선택과 대조적으로 세 영화에는 항상 잠, 꿈, 죽음 등 ‘눈을 감는’ 이미지가 산재하며 이런 형식과 충돌한다. 그 충돌은 임대형 감독의 고유한 세계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된다.
<만일의 세계> 속 암전은 죽음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 <만일의 세계>는 낮게 뜬 태양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만일’과 ‘주희’는 일몰을 바라보고 있다. 만일은 태양을 바라보며 저건 해가 아니라 구멍이고, 그 구멍 안의 다른 세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라 말한다. 그리고 암전이 된 뒤 “빨려 들어갈 것 같다”는 만일의 보이스오버와 함께 제목이 뜬다. 영화가 진행되다 정확하게 같은 쇼트가 반복된다. 똑같은 쇼트가 등장하기 직전 둘은 일몰을 봤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만일은 ‘그때 구멍으로 빨려 들어와서 다른 세계에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둘은 정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아까 만일이 아는 형에게 이 세계에 대해 전해 들은 내용은 특이하다. 춤추는 것은 아주 위험하며, 사랑하는 뭔가를 위해 춤을 춘다는 것이 목숨을 건 사랑을 의미하는 세계라고 한다. 이 얘기를 전하며 만일은 “오늘 꼭 일몰 보고 가자”라고 이야기한다. 주희는 잠을 자듯 엎드려서 만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여기서 다시 암전되며, “너랑 대화가 안 돼”라는 주희의 보이스오버가 들린다. 불안함, 무서움, 시간에 쫓기는 기분을 이야기하는 주희는 계속 만일의 불확실함과 다툰다. 둘은 계속 걷는다. 가는 길에 영화는 인서트로 죽은 매미와 국화 한 송이를 보여준다. 다시 암전된다, 그리고 “할 얘기 남았으면 다 해”라는 주희의 보이스오버가 깔린다. 다시 해가 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해가 보이지 않는다. 탈출할 구멍이 없다. 만일은 목숨을 건 것처럼 격렬하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만일의 춤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다 영화는 암전되며 끝난다.
<만일의 세계>는 시작 지점부터 마지막 지점을 인물들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지르며, 장면 대부분에서 이 방향성을 유지한다. <만일의 세계>는 주희가 구멍을 통해 들어온 이 세계를 탈출하기 위해 직진하는 이야기이다. 주희의 과거와 현재는 계속 만일과 싸우게 되는 원인이며, 인물의 방향성은 이런 과거와 현재를 거스르고 있다. 결국, 영화 속 암전 쇼트는 주희가 만일의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앞선 두 암전이 만일과 충돌하게 되는 지점이었다면, 죽은 매미와 국화를 마주한 이후 두 암전은 만일을 수용하고 사랑하려는 순간이다. <미스터모> 혹은 <윤희에게>와 다르게 <만일의 세계>는 영화가 끝난 뒤 제목이 뜨지 않는다. <만일의 세계>에서 나가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만일(인물)’과 ‘만일(if)’은 구분하지 않았다.
암전 쇼트는 <미스터모>에서도 금산의 병을 언급하는 지점 전후로 존재하고, 이야기를 구분하는 데에 쓰이는 등 <만일의 세계>에서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챕터 구분과 관련 없는 암전 쇼트가 딱 한 군데 존재한다. 바로 네 번째 챕터 ‘작별’의 마지막 부분이다. 여기서 스데반이 서울 집의 문을 닫을 때 암전(이자 유사 페이드아웃)되며, 매치 컷으로 예원이 금산 집 문을 열며 페이드인 된다. 특히 예원이 문을 열고 금산의 일기를 읽기 시작하는 씬은, 첫 챕터 ‘일상’의 마지막에서 금산이 책장의 일기들을 쓸어내리는 장면과 조응한다. 예원의 목소리로 일기를 읽은 지 얼마 안 된 순간에 영화는 챕터를 넘기고, 금산의 목소리로 일기를 읽으며 영화가 지나온 공간들을 시간의 순서대로 하나씩 되짚는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으려 했던 금산이, 직접 일기들을 읽으며 과거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침묵하지 않고 과거를 말할 때, 영화는 완성되기 시작한다. 금산이 무성 영화를 찍은 것은 영화만으로 삶을 대변하지 않겠다는 용기이다.
암전된다는 것은, 눈을 감는 것과 유사하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죽음일 수도 있고, 잠이 드는 것일 수도 있다. <미스터모>에는 잠을 자는 순간들이 계속 반복되며, 잠은 과거를 매개하기도 하며(죽은 아내의 꿈을 꾸는 금산)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회피하는 공간으로 기능(스데반과 예원이 취한 상태로 함께 누워서 나눈 대화)하기도 한다. 다시 암전으로 돌아와서, 영화가 시작되기 위해선 불을 꺼야 한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일종의 잠을 자는, 꿈을 꾸는 행위이다. 결국, 영화는 과거를 매개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회피하는 곳이다. 금산의 영화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는 뱉어내지 못한 폭탄이 불발되며 끝난다. 금산은 영화 상영회에 가지 못했다. 영화가 끝나자, 금산이 병상에서 일어나는 쇼트가 나온다. 잠에서 깬 금산은 안대를 벗고 창 밖을 바라보며, 영화 속 기폭 장치를 눌러본다. 잠시 후 갑자기 폭죽놀이가 시작된다. 영화 안에서 불발됐던 것이, 현실에서 찬란하게 폭발한다. 창밖의 불꽃놀이를 보며 미소 짓는 금산의 얼굴에서 영화는 멈춘다. 그리고 영화는 페이드아웃된다. 이 페이드아웃은 죽음일까, 새로운 영화의 시작일까. 영화는 답하지 않은 채 제목을 다시 보여준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시작하기 위해, 닫을 때
<윤희에게> ⓒ리틀빅픽처스
<윤희에게>에서 암전과 페이드를 이야기하기 전에, 움직임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윤희에게>에서 출근길 승합차, 택시, 이삿짐 트럭 등 탈것들의 존재가 눈에 띄지만, 역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기차다. 탈것은 존재 자체가 운동성을 내포하고, 그 소공간 내에 인물을 붙들어 두는 강제성을 지니며, 탑승의 여부는 전적으로 인물에게 달려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차는 레일의 존재 때문에 출발점과 도착점을 분명하게 매개하는 방향성을 가진 수단이다. 기차의 이런 성질은 편지와 닮았으며, 윤희와 쥰을 매개하는 또 다른 수단으로써 기능한다.
윤희가 쥰의 편지를 처음 발견하고는, 다음날 출근을 포기하고 정처 없이 배회한다. 윤희의 뒷모습은 핸드헬드로 거칠게 잡히며, 이때 기차가 지나간다. 감독은 연출 노트에서 ‘여기가 어디지’라는 윤희의 혼란을 담으려 했다고 하며, 이때 윤희는 기차가 온 방향을 뒤돌아본다. 기차와 기찻길의 존재는 갈 곳을 잃었을 때 인물이 의지할 수 있는 이정표이다. 윤희가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걸어갈 때, 다시 한 번 기차가 등장한다. 이제 윤희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리고 이다음 곧장 영화의 첫 쇼트를 다시 불러오며 디졸브로 윤희의 얼굴 위에 포갠다. 자리를 옮겨 앉는 새봄이 쇼트 안으로 들어오고, 새봄이 기차 안 어딘가를 바라본다. 역쇼트에서 맞은편의 윤희가 등장하는데, 윤희는 새봄을 쳐다보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과 직전 쇼트는 윤희의 시점 쇼트이다. 역행하는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던 윤희는, 이제 앞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감춰둔 과거가 서려 있는 공간 오타루, 오타루로 향하는 것은 과거로 향하는 것일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순행하는 윤희의 쇼트 다음에, 다시 역행하는 기차를 익스트림 롱 쇼트로 붙여 두 방향을 충돌시키며 영화는 이에 대한 대답을 유보한다. 이제 윤희를 오타루에 오게 한 기차는 사라지지만, 영화에선 굳이 한 번 더 기차를 불러낸다. 새봄에게 카메라에 얽힌 뒷이야기, 그리고 이제는 안 쓴다는 포기의 말을 윤희가 전한다. 대화 이후 둘은 다시 산책하러 나가는데, 새봄이 여기에 폐쇄된 기찻길이 있다고 윤희에게 말한다. 윤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윤희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새봄의 부탁이긴 하지만) 직접 카메라를 잡게 된다. 죽은 기찻길일지라도 기차(혹은 기찻길)는 존재만으로 윤희에게 희망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움직임을 살펴본 건 영화의 페이드가 항상 움직임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두 번의 페이드인과 한 번의 페이드아웃이 존재한다. 첫 번째 페이드인은 영화의 첫 장면, 즉 움직이고 있는 기차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두 번째는 앨범을 넘기는 윤희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 두 번째 페이드인 시작 전에, 시작과 끝을 암전 쇼트로 여닫는 시퀀스가 존재한다. 이 시퀀스는 윤희가 기차가 온 곳을 바라본 뒤 암전 쇼트가 붙고, 장례를 치르는 쥰의 이야기로 시작하며 마지막에 쥰이 쓰던 편지를 또 적어 내려갈 때 다시 암전 쇼트로 시퀀스를 닫는다. 첫 페이드인 이후 마사코가 편지를 보내는 장면으로 이어졌고, 두 번째 페이드인 이후에 윤희가 오타루로 떠나는 서사가 시작됐다. <윤희에게>에서 페이드인은 이야기의 시작을 가시화하며, 인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신호탄이다. 남은 것은 단 한 번의 페이드아웃이다.
앞서 <미스터모>에서 얘기했듯 페이드아웃은 영화의 시작이다. 한 번의 페이드아웃, <윤희에게>에서 이 순간은 윤희와 쥰의 재회 이후 둘이 나란히 걸으며 멀어질 때, 이때 페이드아웃이 붙는다. 오로지 두 사람만의 이야기, 우리가 감히 볼 수 없는 영화. <윤희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관객의 눈을 감기고, 지극히 비밀스러운 둘 만의 영화를 마련한다. 꿈에서만 재회하던 두 인물을, 암전을 통해 영화라는 꿈으로 잇는 순간이다. 그리고 보름달로 극장 안의 불을 켠다. <윤희에게>는 이야기를 구분하는 데에 불을 끄는(눈을 감는) 것 말고도 이전까지 쓰지 않았던, ‘달’의 이미지를 통해 ‘불을 켜는’ 방식을 사용한다. 초승달이 뜨고는, 윤희가 쥰의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믐달이 뜨자, 쥰은 윤희에게 편지를 쓴다. 상현달이 뜨자, 새봄이 쥰과의 약속을 잡는다. 그리고 보름달이 뜨자, 윤희가 쥰의 편지에 답장하기 시작한다. 어둠(암전)과 달은, 꿈을 꾸게 하는 밤의 표상이다. <윤희에게>라는 영화는 꿈의 시간이다.
관객에게 보내는 편지
<윤희에게>의 마지막 씬은 윤희가 새 직장의 면접을 보러 가는 장면이다. 윤희는 문 앞에 서서 머뭇거린다. 그런 윤희를 새봄이 카메라로 찍으려 한다. 카메라를 보며 윤희가 웃음 짓는 순간, 카메라가 윤희를 찍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가 암전된다. 알지 못하는 인물을 들여다보기 위한, 과거의 이미지를 간직하기 위해 찍던 카메라가 이제는 윤희를 찍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제목 ‘윤희에게’를 페이드인으로 보여준다. 끝인지 시작인지 모호했던 <미스터모>에서 분명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윤희에게>까지 영화 안에서 인물들이 변화했고, 두 영화 사이에서 임대형 감독 또한 달라졌다. 임대형 감독의 두 장편 제목은 편지에 쓰일 법한 말들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편지를 마무리하는 인사말이며, ’윤희에게’는 편지를 시작하는 말이다. 임대형 감독의 편지는 두 영화 사이에서 어떻게 변화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임대형 감독의 언어로 하겠다.
“나는 꽤나 과거지향적인 사람이다. 과거의 영향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지나간 시간들은 쉽게 잊지 못한다. <미스터모>와 <윤희에게> 모두 그런 나의 성향이 반영됐을 것이다. 다만 <윤희에게>는 과거에 머무르면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멈추지 않고 현재를 다독이며 조금은 미래로 가고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과거를 대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지금은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이 꼭 고통스럽고 불안한 속성의 것들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이은선 기자와의 인터뷰 中 – 임대형, 『윤희에게 시나리오』, 출판사 클, 2020, p.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