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가 지은 동명의 희곡 [안티고네]를 바탕으로 각색된 영화이다. <안티고네>가 흥미로운 점은 인물들의 이름부터 시작해 원작의 시대착오적인 감정선까지 [안티고네]의 재현에 굉장히 공을 들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재현한 요소 중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본다’라는 개념이다. 원작 희곡에서 “눈먼 어리석은 짓”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핵심어로 작용하며, ‘보다’(see)라는 동사의 무수한 변형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비평가들은 [안티고네]를 “누가 진실(상황의 본질)을 제대로 보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보기도 한다(소포클레스, 『안티고네』(번역 강태경), 홍문각, 2018, p.152). 그리고 <안티고네>는 다양한 쇼트를 통해 원작의 이런 요소를 복각한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이 영화가 시선에 관한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안티고네가 카메라를 바라본다고 하기보단, 카메라가 안티고네를 바라보는 것에 가까운 쇼트를 통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잠깐 영화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되짚어본다면 <안티고네>는 지속적으로 현재를 먼저 보여준 뒤, 과거의 사건을 다시 환기하는 방식으로 극을 진행한다. 특히 현재에서는 발화 등을 통해서만 사건을 묘사하며 수용자가 사건을 상상하고 재구성하도록 만든 뒤, 이후에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영화를 구성한다. 안티고네의 머그샷을 찍는 것이 첫 장면이라는 사실은, 앞으로 이 결과에 다다르기 전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카메라가 바라볼 것이라는 영화의 안내이다.
안티고네가 교실에서 가족사를 고백하는 시퀀스 또한 이런 ‘바라봄’이 두드러진다. 이 시퀀스는 안티고네의 목덜미를 바라보면서 뒤에서 연대하듯 비추는 카메라로 시작하며, 안티고네 얼굴 쇼트에 붙는 역쇼트는 항상 비스듬한 각도로 학급생들 얼굴을 비춘다. 이때 처음에 무관심해 보이던 학생들은 안티고네가 이야기하는 진실을 접할수록 그 시선이 안티고네를 향해 모인다. 이런 시선을 이용한 쇼트는 ‘바라봄’의 방식도 있지만, 반대로 ‘눈을 가리는’ 방식도 존재한다. 하이몬이 안티고네를 속여 초밥을 먹이는 시퀀스에서, 하이몬은 안티고네에게 눈을 감도록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제 네 말을 어떻게 믿냐”는 안티고네의 대답이 돌아온다. 즉 <안티고네>에서 시선의 문제는 진실, 믿음의 문제이다.
이런 맥락으로 <안티고네>를 읽을 때 흥미로운 지점은 두 군데가 있다. 먼저 계란과 관련한 장면인데, 초반부 가족의 식탁 시퀀스에서 계란이 담긴 그릇을 인서트로 보여주며 대화가 이어진다. 둘째 오빠인 폴리네이케스가 “우리 갱은 계란도 먹는다, 너네는 못 하지”라는 식으로 안티고네에게 장난을 치며, 실제로도 안티고네가 계란을 먹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이후에 안티고네가 구치소에서 “계란 알러지가 있다는 사람이 나야”라고 말하는 것과 조응한다. 해당 장면에서 영화는 발작을 일으키는 수감자를 감싸기 위해 안티고네가 발언하듯이 묘사하는데, 안티고네가 실제로 계란 알러지가 있는지의 여부는 불명확하다. 결국 카메라가 보여주지 않는 것은 진실로부터 멀어지며, 다만 안티고네의 행위는 진실을 초월하는 의지에서 나옴을 보여주는 쇼트이다. 또다른 지점은 세 번째 재판 장면 속 안티고네의 대사이다. 폴리네이케스가 잡혀 온 것을 보고, 안티고네는 절규하며 폴리네이케스에게 “나를 봐”라고 연이어 소리 지른다. ‘네가 외면하고 저지른 행동의 결과를 직시하라’는 듯, 그렇게 “나를 봐”라고 소리친다.
이후에도 눈이 지워진 크리스티안의 그림, 안티고네가 거울을 바라보며 삭발하는 쇼트, 눈 먼 상담가(예언가) 테레자(원작에선 테레시아스)의 존재 등 시선과 관련한 다양한 쇼트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쇼트는 비극이 발생하는 쇼트이다. 문제의 총격 사건도 처음 벌어질 당시에는 총격의 순간을 보여주지 않으며, 가족사로 고백한 부모의 비극도 이후에야 보여준다. 각각 하나는 타자가 붙든 카메라의 시선, 하나는 어릴 적 안티고네의 시선으로 비추는데 여기서 주목해볼 점은 둘 다 ‘타인의 시선’이란 점이다. 영화 속 카메라가 관객 자신의 눈이라면 하나는 하나 더해진 렌즈로 인해, 다른 하나는 필연적으로 왜곡을 동반하는 기억의 특성 때문에 왜곡을 동반한다. 즉 영화에서 진실이라고 비추는 것은 언제나 왜곡돼 있다. 그래서 영화는 항상 영화 속에 현재 존재하는 인물의 얼굴, 특히 안티고네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추방당하는 안티고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안티고네는 추방당하면서 다른 이민자 가족과 교차한다.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닮은 아이와 잠시 눈빛을 주고받은 뒤 다시 걸어간다. 카메라는 안티고네의 뒤에서 안티고네를 비추고 이때 하이몬의 벨소리, 연대의 벨소리가 어디서 들려온다. 나는 이 벨소리가 카메라의 것이라 생각한다. 안티고네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보게 된다. 영화의 첫 시작에서 카메라가 안티고네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사건을 보여주려 했던 것은, 마지막 결과에서 안티고네를 향해 연대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카메라는 “이런 이야기가 있고, 그래서 나는 안티고네와 연대하겠다”라 말하며 다소 노골적인 태도를 취한다. 카메라는 꿋꿋이 안티고네의 얼굴을 보여준다. 이제 그 얼굴을 함께 마주할 지의 여부는 관객에게 달렸다.
▲ <안티고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첨언: <안티고네>에 대한 정보를 찾던 중 실화 기반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탕이 된 실화는 2008년 퀘벡에서 벌어진 경찰 오인 사격 사건으로, 경찰이 형 대니 빌라누에바(Dany Villanueva)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격발한 경고 사격으로 동생 프레디 빌라누에바(Fredy Villanueva)가 사망한 사건이다. 전과가 있는 형제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전과가 없는 형제가 사망했다는 사실, 국경관리국에서 대니의 강제 추방을 시도(attempt)했다는 사실 등 영화와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대니 빌레누에바는 추방되진 않은 것 같다). 앞서서 안티고네가 영화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 언급했던 내용을 환기한다면 이 영화의 존재는, 현실 속 사건(현재)과 조응하는 사건의 전말(과거)을 극으로 재구성하려 한 시도로 비춰진다. 현실의 사건을 극으로 진실하게 보여주겠다는 태도는 자칫하면 굉장히 위험해질 수 있다 생각하는데, 영화가 원작 희곡의 재현에 공을 들인 건 ‘확실한 허구’를 끌어오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