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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Apr 23. 2024

배려를 양보합니다


강의를 끝나고 점심 먹을 때였다. 웹툰을 그린다는 분이 고민이 있다고 물어보셨다. 다름 아니라 사업을 제안할 때 예산 항목을 작성해야 하는 데 때로는 너무 적게 작성을 해서 문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용을 더 들어보니 본인이 기획서를 쓰는 데 그에 따른 예산을 잡을 수 없으니 고민이라는 거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내용인지 바로 이해가 되었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무수히 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돈에 대해 대놓고 말하는 것이 어렵다. 작가가 원고료를 물어본다거나 강사가 강의료를 물어보면 돈을 밝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예술가가 무슨 돈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느냐는 식이다. 심지어는 밥 한 번 사는 걸로 남이 고생한 노력을 퉁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게 한국 사회이다. 이런 형편이니 그이 역시 자기 입으로 인건비에 해당하는 돈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나마 물어볼 사람이 생겨서 용기를 내어 물어보는 것이리라.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사업에는 기획료라는 게 없다. 사업을 기획하고 제안서를 쓰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짧아도 하루 이상 걸리는 게 대부분이다. 기획서만 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업이 선정되면 사업 진행을 도맡아서 해야 하고 사업이 끝난 후에 결과 보고서까지 써야 한다. 그런데 그 고생을 하고도 아무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니 누가 기획서를 쓰려고 하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누군가 그 일을 맡아서 해주었으면 한다. 자신은 하지 않으니 상관없겠지만 사업 시작 전부터 사업이 끝난 후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고맙다, 애썼다는 말 한마디로 퉁치고 끝내려 한다. 이러니 본인으로서는 답답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 내막을 모르는 이로서는 사업이 선정되어 돈이 나오니 그것에만 관심이 간다. 그것도 나에게 어떤 혜택이 있을까, 얼마라도 내가 가져갈 수 있을까만 신경이 쓰인다. 그러니 기획자에 대한 배려나 관심이 있을 리 없다.      


이런 게 그이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떠밀려 사업 기획서를 쓰기는 하지만 그 일이 재미있고 신이 날리 없다. 처음 한두 번은 의욕적으로 매달려 밤을 새워 서류를 쓰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그 자체가 힘든 일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체 사업비의 10%나 20%를 달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고생한 만큼 인정을 해주고,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현행 제도에서는 그걸 인정해주지 않는다. 노력 봉사도 한두 번이지 지치지 않을 수 없다.      



행정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이 제법 많다. 누군가 일을 해야 사업이 굴러가는 데 인건비 항목을 책정할 수 없다. 처음 누군가 예산안을 짤 때, 그런 제약을 두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일하는 사람만 죽어난다. 이런 형편이니 누가 일을 하려 하겠는가? 어차피 그 일이 아니어도 본인이 할 일은 있다. 새로운 사업이 생기면 그 일에 따른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 보상도 없다. 엉겁결에 새로운 일만 하나 더 생기는 셈이나 누가 좋다고 하겠는가.      


구성원끼리 합의가 되어 어느 정도 배려를 해준다면 모를까 현재는 달리 방법이 없다. 아마 그마저도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하기 싫지만 다른 사람이 이익이 되는 걸 시샘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 눈앞의 이익에 더 민감하다. 사업이 선정되어 잘 마무리해도 칭찬 한 마디가 인색하다.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떨어지면 실력이 없다는 핀잔이 돌아온다.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돌아서는 그이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젊다는 이유로 이 힘든 일을 맡았을 텐데 끝이 보이는 일도 아니다. 해마다 사업은 나오고 누군가는 써야 할 텐데 아마도 그이 몫일 것이다.      


그 마을에 사는 동안 내내 이런 일이 시달릴 게 뻔하다. 본인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대개 행정일은 지루함과 답답함의 연속이다. 적은 예산을 주고도 영수증 처리며 사용하는 내내 괴로운 게 대부분이다. 거기다 본인 일도 아니면서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본인 포트폴리오에 기획서를 쓰고 예산 집행한 일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배려가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책정해야 할 예산 항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고려하지 않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부디 그이가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사업도 생길 것이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그 사업을 하면서 보람을 찾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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