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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꼬마리 Oct 22. 2024

빛 안 좋지만 먹을만한 살구

-첫사랑과의 재회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것 외엔 취미도 관심도 두었던 일들은 딱히 없었다. 글 쓰는 게 뭐가 좋았냐고 물으면 이제 생각해 보니 ‘진짜 내가 글 쓰는 게 좋았나’ 나에게 되묻고 싶어 진다. 사실은 엄마가 글을 사랑했던 거지, 나 말고 내 엄마 지니 씨가.

엄마는 학생 때부터 글짓기 상이란 상은 다 쓸었고 안 읽은 책이 없을 정도로 문학을 사랑했댔다. 드라마나 영화 주인공들은 항상 필연적인 시련과 역경을 마주하는데, 우리 엄마 지니 씨도 꼭 그 꼴이었다. 도박 중독 아빠에 억척스러운 엄마를 둔 어린 지니는 사랑하는 문학을 뒤로하고 시꺼먼 먼지 가득한 공장으로 취업했다.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봐 동생이 둘이나 있어서 하루아침에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소녀 가장이 된 거다. 그다음엔 꼭 드라마에서는 짠- 하고 귀인이 나타나 삶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던데. 지니 씨의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그녀의 반짝 귀인이었다. 학교 다니는 내내 반장과 전교 회장을 도맡았고 글도 잘 써, 공부도 잘하는 이 모범생을 시꺼먼 공장에 둘 순 없었던지 어디 은행에 취업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우당탕탕 지니 씨의 성장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이제부턴 로맨스까지 곁들인다. 할 줄 아는 건 글 쓰고 책 읽고 감동받아 눈물 한 방울 훔치는 문학소녀가 갑자기 돈을 만지고 숫자를 세라니 지니 씨에게는 이거 너무 가혹한 일이었던 거다. 매일 선배에게 혼나고 창구 손님들은 기다리다가 한숨 푹푹 내쉬며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했다. 그런 지니 씨의 축 처진 어깨를 다독인 건 주임 추니씨였다. 신입인 지니 씨는 사내 연애를 들키면 죽음뿐이라고 생각했던지 ‘자기야’ 같은 낯간지러운 애칭은커녕 ’ 오빠‘ 소리도 못하고 러브레터에마저 ‘주임님, 좋아해요.‘라고 쓰던 순둥이었다. (지금은 ’돌머리+추니’를 섞어 ‘돌춘아!’라고 잘만 부르지만.) 둘은 복사기도 다 아는 비밀 사내 연애를 끝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피 엔딩이면 좋을련만, 지니 씨의 (살짝 행복이 가미된) 불행은 이제 시작이었던 거다.

줄줄이 아이를 셋이나 낳고 지니 씨는 꿈에 그리던 복직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다. 중간중간 동네 은행에 일손이 부족할 때 아르바이트를 나가긴 했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었다. 정리도 야물딱지게 잘하고 성격도 싹싹한 지니 씨는 일을 하지 않는 자신이 내내 안타까우면서도 한심했다. 이십 대부터 삼십 대를 육아로 보낸 지니 씨는 그녀가 하고 싶던 것들을 자식들에게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사랑하던 책들을 사고 또 사고, 책장이 꽉 채워지도록 산 후에 나에게 매일 밤 읽혔다. 그리고 초등학생인 내 글짓기 숙제에 본인의 문학 실력을 뽐내곤 했다. 여기엔 이 단어를, 문장은 이렇게, 글에 어울리는 속담까지 찾아 넣어 내가 쓴 글을 싹 다 고치곤 했다. 덕분에 초등학교 방송실에서 여러 번 글짓기 상을 타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렇게 나는 꼼짝없이 글을 쓰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지니 씨의 글 실력이 곧 내 실력인 줄 착각하곤 입시에서 논술과 문학으로 대학을 가려다가 보기 좋게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지니 씨 없는 내 글이 얼마나 알맹이 없는 겉만 번지르르한 ‘빛 좋은 개살구’인지 깨달았다. 그 이후론 글은 쳐다도 안 보고 쓰지도 않았다. 그냥 점수에 맞춰 간 유아교육을 졸업하고 안전히 유치원 교사로 살았다.

몇 년을 유치원 교사로 살다 보니 통장은 채워지는데 기쁘지가 않았다. 텅텅 빈 영혼은 그냥 바람 따라 굴러다니는 낙엽 같았다. 이대로는 못 살겠다 싶어 퇴사를 하고 며칠을 겨우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침대에서 앓다가 갑자기 번뜩 일어나 색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 싫어 미술 시간에 몸서리를 치대곤 했는데 색연필을 잡고는 며칠 동안 못 잤던 잠을 푹 잤다. 다음 날도 밥도 잘 먹고 화장실도 잘 가고 제시간에 꼬박 잠도 잘 오는 거다. 아, 나는 이제 꼼짝없이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 뒤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누가 보면 지어낸 이야기 아니냐고 하겠지만, 내 입장에선 그림이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년의 사랑이었던 거다.

아무튼 그림을 그리다 보니 이젠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다. 내가 하고 싶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맘껏 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천년의 이상형도 권태기가 온 건지 뭔지 첫사랑 ‘글’이 그리워졌다. 다시 글을 쓰려니 실은 좀 두렵기도 하다. 전에 사용했던 유려한 단어들과 꾸며대는 말들을 빼고 나니 투박한 문장과 진짜 내가 남았다.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이젠 지니 씨가 없어도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거 말고, 빛 안 좋지만 먹을만한 살구 같은 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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