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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꼬마리 Nov 14. 2024

얹혀버린 생일 상

지난주는 생일 주간이었다. 매일 월요일 아침마다 글을 써보겠다는 단단한 다짐을 단 2주 만에 깨어버린 것도 생일 때문이었으면 차라리 신나기라도 했겠다. 눈 뜨자마자 카톡으로 수정 요청을 받고 침대에서 일어나 바로 책상에 앉아야 했다. 그날은 하-루-종-일 책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는. 정말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 혹은 부처라고 생각해 왔던 것 같다. 성인의 탄신일 마냥 생일 한 달 전부터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준비하는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했고 연등을 올리는 마음처럼 생일이 오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실은 생일에만 이렇게 들뜬다기보단 온갖 기념일이나 이벤트 날이 되면 하루 종일 발 동동 구르고도 주체가 안되어서 입술을 꽉 깨물어도 피실 피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사람이었다. 대기업의 상술이라는 기념일에 마저 몸을 들썩이는 인간으로 자란 건 순전히 우리 엄마 지니씨와 아빠 추니씨 때문이다.


지니씨는 이벤트를 준비하는 걸 참 좋아했다. 그리고 그 이벤트 준비에는 장녀인 내가 꼭 함께였다. 글씨도 못쓰는 네다섯 살 때도 추니씨의 생일이면 꼭 편지를 함께 써야 했고 (거의 지니씨의 작품이었지만) 추니씨를 향한 사랑의 하트 총알 사진도 찍어야만 했다. 뭐, 추니씨는 나의 아빠이니 그렇다 치지만 지니씨의 동생, 그러니까 나의 이모들의 생일에도, 지니 씨의 친구 아들의 생일에도(친하지도 않고 잘 모르는데), 이모들의 자녀가 어린이 집에서 미소 천사 상을 받아왔을 때도, 지니씨와 추니씨의 결혼기념일에 마저 나는 사랑의 하트 총알 사진을 찍곤 했다. 가장 어이없던 건 아무래도 지니씨와 추니씨의 결혼기념일 이벤트 준비였는데 글씨를 보고 따라 그릴 줄은 알았던 어린 도연은 지니씨가 써준 글씨를 예쁜 하트 편지지에 고대로 옮겼다. 엄 마 아 빠, 결 혼 을 축 하 합 니 다. 아 빠 사 랑 해 요. 행 복 해 요.’ 결혼을 이제 와서 왜 축하하는지 아직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지니씨와 추니씨의 결혼 축하는 3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내 뒤로 태어난 두 동생까지 합세해서 지니씨와 추니씨의 결혼을 축하하는 거다. 그 날 열 두시 땡! 치자 마자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카톡 창에 메시지를 보낸다. ‘엄마, 아빠 결혼 축하합니다~! 오늘 신나는 데이트나 하쇼~ 오늘 같은 날엔 집 들어오지말고~^^^^^^’


지니씨의 딸로 태어난 나는 더더욱이 요란한 생일 파티를 치르곤 했다. 초등학생 때는 반 친구들 모두를 집에 불러서 치킨이나 햄버거를 시켜주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치킨을 몇 마리씩 시키는 건 재정 상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집에서 닭고기에 튀김옷을 입혀 지니씨가 직접 치킨을 튀기곤 했다. (그땐 유튜브도 활성화가 되기 전이었는데 어디서 보고 배운 건진 모른다. 그렇다고 지니씨가 뚝딱- 요리를 잘하는 엄마는 아니다. 이건 딸인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진짜로.) 생일에만 이렇게 요란하면 모르겠는데, 내가 이를 뺀 날에도 꼭 파티를 해야 했다. 이빨 파티, 이름만 들어도 너무 섬뜩해지는 파티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이빨 파티는 사라지고 이빨 요정이 주는 용돈으로 행사가 대체되었는데 이 일화도 진-짜 웃기다.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이빨 요정’ 책을 대출해서 읽고 나선 그게 너무 감명이 깊었던 어린 도연은 지니씨에게 환상과 신비의 이야기를 하듯 책 줄거리를 쏟아냈다고 한다.


-빠진 이빨을 베개 밑에 두고 자면 소중한 선물을 준대. 그게 돈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작은 반지나 목걸이 일 수도 있대! 이빨 빠진 어린이가 슬퍼하지 않도록 이빨 요정이 선물을 두고 가는 거래. 엄마, 너무 신기하지?


이 이야기를 한 후부터 이빨을 뺀 다음 날이면 이빨 요정은 베개 밑에 둔 이빨은 쏙 가져가고 대신 천 원짜리 세 장을 두고 갔다. 잠에서 깨서 요정이 두고 간 선물을 발견한 어린 도연은 신나게 지니씨에게 달려간다. “엄마, 진짜로 이빨 요정이 있던 거야. 나한테 돈을 주고 갔어. 그것도 세 개나!” 지니씨는 어린 도연의 신비와 환상의 세계를 지키는 것만이 자신이 하는 모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 여기서 진-짜 웃긴 부분은 나도 얼마 전에 안 일이지만 내 동생들은 이빨 요정의 축하 선물 따윈 없었고 그냥 이빨을 빼고 나면 지니씨가 삼천 원을 손 위에 턱 하고 올려줬다는 거다. 삼남매 육아에 지친 지니씨는 몰래 이빨 요정으로 변장할 힘마저 없어진 거지. 나에겐 이빨 요정의 선물이었던 신비하고 아름다웠던 삼천 원이 동생들에겐 그냥 이빨 값이 되어버린 거다.


그에 반해 추니씨는 어떤가. 낭만이라곤 1도 모르는 무뚝뚝의 표본 그 자체였다. 그런 추니씨는 낭만 소녀 지니씨를 만나 로맨티스트의 발 끝이라도 쫓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 발렌타인이며 화이트데이며 뭐 남자가 여자한테 주는 날이라는 둥, 이 날은 그 반대라는 둥 그런 거 따위 잘 모르는 추니씨는 그냥 편의점에서 초콜렛이든 사탕이든 위에 리본 장식이 붙어있는 날이면 봉지 한가득 사 와서는 지니씨에게 갖다 바쳤다. 물론 먹는 건 세 남매의 몫이었지만. (지니씨는 단 거라곤 치가 떨릴 만큼 싫어한다. 나는 맛만 있는데 단 걸 먹으면 두통이 온대나 뭐래나...)


아무튼 이런 집안에서 자란 첫째 딸의 생일은 언제나 성대했고 상다리가 부러졌으며 십이 첩을 내놔도 지니씨는 항상 “먹을 게 없어서 어떡하냐..”라고 미안해하곤 했다. 이번 생일은 평일이라 며칠 앞당겨 식구들이 다 집에 있는 주말에 생일 잔치를 벌였는데 그때도 지니씨는 감자탕에 육회, 새로 담근 배추 겉절이에, 생선 구이, 계란말이까지...(사실 더 있는데 기억도 안 난다. 동생의 말에 따르자면 호박전도 부치려고 했다가 추니씨가 제발 그만하라고 했다고 한다.) 정말 알 수 없는 조합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가득한 상 앞에서 지니씨는 이번에도 “너무 차린 게 없지?” 하곤 머쓱해했다. 옆에서 추니씨는 눈치도 없게 “아빠도 조금 도와준 거야~” 라며 육회 접시를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차린 게 너무 많아서 빈 속에 물 한 모금 마셔도 속이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음식에 체한 건지, 지니씨의 사랑에 체한 건지 아무튼간 밥을 다 먹고 세 시간도 못 앉아있다가 내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양손 가득 오늘 상에 차려진 음식 보따리를 들고.


그날 저녁은 소화제를 먹고도 속이 안 좋아 몇 년 만에 양손 엄지 손가락을 땄다. 뾰족한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자마자 검붉은 피가 뚝뚝 바닥에 떨어질 만큼 피가 계속 나왔다. “대체 평소엔 조금만 배불러도 다 남기는 애가 오늘은 체하도록 뭘 그렇게 많이 먹은 거야.” 손을 따준 친구는 에탄올 솜으로 피가 멈춘 손가락을 닦아주더니 내 등을 아프지 않게 주먹으로 탁탁 쳐주었다. 이래야 소화가 빨리 된다면서.


그니까. 오늘 같은 날은 절대로 음식을 못 남기겠는 거지.  삼십 이년 째 내 생일상을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면서도 차린 게 없다며 미안해하는 지니 씨의 목소리는 알았어도 생선에 있는 뼈를 다 발라서 하얀 살만 내 밥 위로 얹어주는 그 손을, 내가 맛있다고 말하면 동그래지는 그 눈동자를, 가는 길에도 혼자 있으면 감자탕 뼈 치우기 분명 귀찮을 거라고 고기만 모아서 따로 싸주는 그 마음은 이제야 알아버려서. 진짜 쌀 한 톨도 못 남기겠는 거지. 그걸 바보 같은 나만 몰랐던 거다.


생일 당일은 조용히 지나갔다. 성대한 파티도, 홀 케이크도 없었다. 그 전날에 사 온 소보루 빵 위에 초를 꽂아 소원을 빌고 촛불을 불었다. 출판사의 수정 요청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하고는 냉동실에 넣어둔 감자탕을 꺼내 데워 먹었다. 뼈 하나 없는 부드러운 감자탕. 그리고 지니씨의 커다란 사랑 거기에 추니씨의 수줍은 사랑도 곁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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