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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Dec 08. 2023

허둥지둥 엄마의 민낯

오늘은 온라인 글쓰기 모임이 있는 날.


2주에 한 번, 오전 10시에 줌에서 만난다.

이번주 발제 도서는 미리 틈틈이 나누어 읽었고, 남은 몇 장은 오늘 새벽 기상으로 마저 읽었다.

가족들이 모두 나가고 아침 설거지를 마친 후 머리를 감았다. 평소보다 부지런을 떤 덕분에 커피를 내리는 시간이 여유롭다. 똑똑 떨어지는 커피 소리를 들으며, 진하게 풍기는 향을 음미하며, 이번 주 발제문을 열어 천천히 읽어본다.

'?책을 좀 다시 열어봐야겠네.' 

'... 나 이런 거 아니겠지.'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아니 남아서, 왠지 회원 여러분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남아서, 가 확실하다. 시간이 있으면 생각거리, 할 거리를 찾고야 마는 나다) 곱게 립스틱을 바르고 와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이제 세 번의 참여일 뿐이지만 그간의 경험에 의하면, 9시 40분쯤이면 '줌 열었습니다'라는 톡이 올라왔었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직이네. 시간을 본다. 9시 45분이다.

이번에는 날짜를 본다. (보고 싶더라...)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표기된 오늘 날짜는 12월 7일.

아. 



이상하다.

'12월 8일'이라는 공지 속 날짜가 분명 머릿속에 이미지처럼 박혀 있었는데. 어제가 6일이라는 것 또한 어떤 이유로 명확하게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런 착각이라니.

'뭐. 잘됐네. 글 쓸 채비 끝냈네' 라며 브런치를 열고 있지만, 어쩐지 불만과 불안이 꾸물거린다.

낯선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벌써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니. 







시한부의 육아 휴직 기간을 보내고 있다.

'육아'를 요하는 자녀의 나이에 한도가 있으니 마지막 기회다.

한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 애썼다. '이 세상은 하고 싶은 것 투성'이라는 세계관의 소유자가 그간 꾹꾹 눌러왔던 욕망을 분출하겠다 작정했다. 육아, 교육, 자기 계발 모두에서 그려온 것이 있었다. 그러니 딱히 수고나 고생의 애씀이라 할 수 없겠다.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만나는 어려움마저도 내가 자처한 일. '나의 선택'이라는 주체성은 웬만해서는 기꺼울 수 있는 힘을 준다. 인생의 진리인 것을, 그렇지는 못한 직장과 업무 속에서 오래 살다 보니 잊었더라.

다만 잡히지 않게 휙 지나가버리는 시간이 덜 허무하도록, 뭐 하나라도 더 하려는 조바심과 욕심이 올라왔다. 그나마 휴직이 주는 여유 덕에 압박 대신 '열정'으로 발산되었다.


작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구절이 있다. '글은 마감이 써준다.'

명기된 시한은 확실히 사람을 리게 하고, 느슨할 뻔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며 결국 결과를 만들어내게 한다. 나답지 않게 계획했던 것들을 착착 시작하고 나태할 틈 없이 유지할 수 있던 것도, '내가 선택한 길'이라는 책임감과, 망할 '시한'의 콜라보가 이룬 합작품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말입니다.


열정 품은 가슴을 머리가 못 받쳐주는 일이 잦아졌다.

이를테면 오늘 같은 일 말이다. 아니. 그래, 주부로 살다 보면 날짜나 요일 개념이야 순간 흐려질 수 있지 뭐. 백번 양보할 수 있다 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어떤가.


쌍둥이의 수영 강습을 오랜 기다림과 열정으로 등록한 후, 한 달을 주 3회 열심히 실어 날랐다. 축구 교실로 가서 아이들을 태우고 수영장으로 간다. 집에서 출발할 때 수영복 등 장비와 세면도구, 속옷을 넣은 두 개의 가방을 챙긴다. 축구장에서 수영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쌍둥이가 먹을 간식도 따로 챙긴다. 이게 퍼펙트다.


처음에는 축구 교실로 가는 길이 초행이라 예상치 못하게 조금 늦었다. 그 후 두어 번 만에 금세 익숙해진 나는, 근거가 무언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고 말았다. 네비에 나오는 정석의 길 말고 왠지 지름길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남편의 말이 떠오른다. "자기가 자신감에 차 있을 때 난 불안하지.")

'여자는 육감'이라며 확신에 찬 그다지 육감적이지 않은 여자는, 출발할 때와 다르게 낯선 길에서 삐질거리다 축구장에 십 분이나 늦고 말았다.

두 번이나 아이들을 기다리게 하다니. 아이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이 무슨 민폐인가.

방향 감각은 제로에 가깝지만 다행히 양심은 충만한 나는, 그다음에는 작정하고 일찍 출발하였다. 익숙한 길을 택했고 빠르게 도착했다. 아이들은 축구가 끝났을 때 미리 기다리고 있는 엄마에게 달려와 안겼다. 아, 이 맛이지.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챙겨 온 간식을 쥐어주고, 뿌듯함과 앞으로의 다짐을 새기며 수영장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장에 다 왔을 때 시계를 보니 15분이나 이르다. 후훗. 역쉬 베스트 드라이벌~

슬슬 내릴 준비를 하며 두리번거리던 아이들이 묻는다.

"엄마, 수영 가방은요?"

 

아?

하아...




바짝 마르는 입술을 이로 연신 깨물며 당장 집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문 앞에 고이 기다리고 있는 수영가방 두 개를 들고 다시 수영장으로. 젊지도 않은데 사서 고생하고 난리다. 애초에 서둘러서인지 강습 시간에 오 분 정도 늦었을 뿐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이들이 수영장에 들어가고서야 급한 불 끈 엄마는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숨을 돌린다. 미안함과 자책감에 휩싸인다.


대체 왜 이 모양이니.

뭐가 이리 허술하담.


그렇게 한참 널브러져 있는데, 아까 가방을 가지러 다녀오는 길에 아이가 뒷자리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내가 오랜만에 학교에 일찍 갔는데 숙제를 안 해갔을 때 같네요?"

급한 마음으로 운전하다 사고라도 날까 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나는, 아이의 말에 빵 터졌다.

한껏 솟았던 어깨가 스무스하게 내려왔다.






저녁 설거지를 시작하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엄마의 합법적인 유튜브 시청 시간이다. 오늘 재생한 영상은 이연 작가의 것이었는데 '나의 민낯 사랑하기'가 주제였다. 별생각 없이 클릭했는데 '요즘 알고리즘은 생각도 읽나' 무서워질 정도다.


내용 중 와닿는 부분은 이러했다.

'나의 장점과 단점을 대칭으로 생각한다.'

나에게 대입해 본다. 당장 생각나는 나의 단점은 '꼼꼼하지 못하고 구멍이 많다'는 것. 단점만 생각하면 나를 사랑하기 어렵다고 영상은 말한다. 그렇지. 요즘의 나처럼 자책하기 일쑤니까. 그러니 입체적으로 생각해라고 한다. 즉, 이 단점을 장점으로 대칭하여 보는 거다.  


허둥지둥하고 어설픈 엄마를 본능적으로 파악한 아이들은 언젠가부터 자신의 것을 알아서 챙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첫째는 본인 것뿐 아니라, 엄마 그거 챙겼냐며 엄마까지 챙긴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하는 힘이 생기고 남까지 돌볼 줄 아는 넓은 시야가 길러지는 데 내가 일조하는 걸까. 그게 나의 '덕분'인지 '때문'인지 좀 헷갈리지만.


내가 너무 서툰 인간이기 때문에 좋은 점이 또 있다.(좋은 점이 줄줄이 달려 나오다니, 이거 기분마저 좋아지는 연습이구나.) 타인에 대한 기대랄지 장벽이 높지 않은 것.

직장에서 이 정도 연차가 되는 동료들, 혹은 더 위의 상사들은 신규로 들어오는 젊은 직원들에 대해 여러모로 아쉬움을 토로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물론 반대쪽의 입장도 마찬가지리라.) 나는 정말이지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깨지고 부딪치며 성장한 사람이다, 심지어 여전히 떨리고 허술함 투성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느낀 것은, 버릴 경험은 없다는 것이다. 뭐 하나는 반드시 배운다는 것.(일부러 돌아갈 필요 없지만, 어쩌랴.) 나 자신이 이러니, 이제 시작하는 그들에게 관대할 수 있는 것 같다.

잘하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대상을 바꾸어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렇다.

수영을 마치고 엄마에게 달려와 안긴 아이가 머리 위에 덜 헹군 샴푸 거품을 휘핑 크림처럼 얹어 왔을 때, "뭐가 급하셨나 봐~" 하고 깔깔대는 엄마인 것이. 그래서 그렇다.

"까짓것, 엄마는 예사야~"

허둥거리고 어설픈 '덕분에' 타인에게 더 느긋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었다 생각하니, 이연 작가의 말마따나

부끄러운 나의 민낯도 조금 사랑스럽게 봐줄 수 있겠다.



 

* 사진 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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