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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Dec 14. 2023

ㄱ나니, 그 겨울밤

H에게.


난 지금 어린이 도서관.

우리 집 세 아이는 들어오자마자 만들기 작업실에 들어가고, 나는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아 내 책을 읽고 있어. '적당한 자리'라고 했지만 실은, 딱 찍어놓은 내 자리가 있단다.


이곳 어린이 도서관은 말이야. 좌식이라고 해야 할까. 마룻바닥으로 되어 있어 신발을 벗고 들어오지. 날이 쌀쌀해지면서 도서관에 난방을 하잖아? 전체 공기를 데우기 위한 히터뿐 아니라 보일러를 틀어서 바닥까지 따뜻하게 해. 내가 이 도서관을 겨울에 특히 즐겨 찾는 이유지. 근데 그거 알지. 바닥이 고르게 따뜻하지는 않은 거. 그러니 어슬렁어슬렁 다니면서 탐색에 들어가는 거야. 산삼을 찾아 헤매는 심마니처럼 열선이 지나가는 바닥을 찾아서. 발바닥에 뜨끈함이 감지되면 은근슬쩍 자리를 잡지. 어흐~ 이제 그 자리에서 겨울을 나는 거야. 도서관에서의 나의 아지트랄까.

그렇게 찜해둔 '내' 자리가 있었는데 말이야. 아 글쎄, 도서관에서 가끔 책장 배치를 바꾸지 뭐니. 지난겨울에 즐겨 찾던 딱 그 자리에 책장이 들어섰어. 흠미, 아까븐 긋.

지지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글거리는 K-아줌마는, 발바닥에 온 감각의 기운을 모아 모아서 다시금 새로운 둥지를 찾아내지.


그래. 지금 나는 새로 찾은 나의 자리에 앉아있어. 

점심을 먹고 조용한 도서관에 아늑한 구석에 몸을 구기고 앉아 책을 보려니, 으음. 잠이 솔솔 오네... 나이 들면 낮잠이 는다더니...






"어린이 여러분~"

잠이 올랑말랑 눈앞도 뇌도 말랑해지려는 찰나였어. 어떤 낭랑한 목소리가 갑자기 내 옆을 지나가는 거야.  바람에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떠졌지.

"네 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호랑이 담배필 적 옛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사서 선생님은 젊은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커다란 곰돌이만 한 체격에 비해선 꽤 가벼이, 잰걸음으로 도서관 내부를 오가고 있어. 호랑이 담배필 적 옛이야기 시간을 반복해서 안내하느라고.

"옛이야기 듣고 싶은 친구들은 이야기탑으로 모여주세요~"

시작됩니다아~? 모여주세요오~? 하고 끝을 올리는 그의 말투는 무척 다정하고 명랑하게 들려. 나만 느끼는 건 아니었는지 에너지를 받은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그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어 아이들을 몰고 이야기탑이라는 방으로 사라졌어. 

그가 멀어지며 그의 말소리도 작아졌지.


분명 눈은 책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귀는 가까웠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그의 안내말소리에 기울이고 있었어. 그러면서 머리로는 뭘 떠올렸게?


찹쌀떡 아저씨.






시공간을 뛰어넘어 당도한 때와 곳은 이십 년 전의 노원이야.

정확히 스물한 살. 상계동 마들역 주공 12단지.

쪼꼬만 여자 룸메이트 둘이 각자의 미래를 꿈꾸며 각자의 시험을 준비하던 겨울밤이었지. (중,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한 우리는 수능이 인생 마지막 시험일 거라 믿었지만, 그렇지 않더라.) 특히 그날은 너의 편입 시험을 코앞에 둔 밤이었잖아.



창밖도 집안도 캄캄한 중에 두 개의 스텐드로만 등잔밑을 밝히고 있을 때였어. 고요한 공기를 뚫고 어떤 소리가 들려왔지.


"찹쌀~~~~ 떡!"


그 소리는 멀고도 가까웠어. 진부한 표현인 것도 같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소리의 거리감이, 지금 떠올려도 신기하고 신비롭게 느껴져.

그런데 더 근사한 게 뭐였는지 아니. 세상에. 찹쌀떡만큼이나 찰지고 구성진 발성이라니.


씨익, 미소가 지어졌지. 

이렇게 시의적절하다고? 아니 그보다, 찹쌀떡을 외치고 다니는 찹쌀떡 장수가 아직도 존재한다고?

우리는 의뭉스럽게 눈을 맞추고 무언의 합의를 이루었지.

얼른 문을 열고 아파트 복도 난간을 집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어. 소리의 근원을 좇아 두리번거렸지. 

저어기, 떡통이 틀림없는 상자를 맨 아저씨 발견. 나는 거침없이 외쳤어.

"아저씨~! 여기요~~!!"

아저씨는 위를 올려다봤고, 그를 놓칠세라 우리는 한마음으로 팔을 마구 휘저었어.


기억나니. 

우리는 복도에서 팔을 엉성하지만 열심히 팔을 흔들어댄 것 밖에 없었어. 그런데도 아저씨는 기가 막힌 촉으로 단번에, 정확히, 우리 집 문 앞까지 찾아오셨잖아. 나 그때 있지, 명치쯤에 뭔가 뜨거운 게 올라왔었다. 진정한 프로다, 장인이다, 이런 말이 생각났어. '촉'이 본능처럼 탑재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고 세월을 겪어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생각했지. 몸으로 배운 운동은 몸이 기억한다고 하잖아. 몸을 쓰는 일, 노동에 대해 신성하다는 느낌을 그때 어렴풋하게 받았던 것 같아.

그 순간조차도 우리는 머리를 쓰는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우리가 더 공부하려는 이유조차 마찬가지였지만.


'합격 기원' 선물이라며 나는 생색을 냈던 것도 같아.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다소 어색하고 수줍은 기색으로 고맙다고 말했던 것 같고. 그러고는 식탁에서 쫄깃하고 달달한 그 찹쌀떡을 나누어 먹었지.






꽤나 오래된 일인데. 잊고 있었는데, 이리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게다가 장면장면이 마치 그림책 삽화처럼 생생하면서 뽀얗게 곁들여지는 거야. 기억은 원래 좀 미화되긴 하지. 아름답게 기억되니 '을마나 다행이게요~'


H야.

(아. 이쯤에서 이렇게 한 번 부르니 새삼 촌스럽다. 그래도 왜, 문예창작과 학도인 네가 과제로 소설을 쓰면 내가 퇴고를 도우며 감정을 잔뜩 실어 낭독하곤 했잖아. 그러네. 그 시절 스타일 아니겠니.)

우리가, 궁색하지만 소소하게 깔깔대며 열심히 산 그때의 하루하루가 이십 년 후 '지금의 우리'에 일조를 했을지 궁금해. 이게 맞는 건지 아닌지 몰라 여전히 헤매고 있지만. 어쩌면 그래서, 다시금 헤매는 마흔 하나라서 스물 하나의 밤이 떠올랐는지 모르겠구랴.

느닷없이 조금 센치해지고 만 거. 겨울에 들어서서, 혹은 오늘따라 비가 와서겠지? 

(늙어서,라고 하면 호온~난다!)



P.S. 자고로 라떼 편지에 추신 한 줄 안 들어가면 섭하지.

아니 그런데 말이야. 문학도의 소설을 감히 퇴고하던 나 대관절 뭐니.(심지어 나, 거기에 어떤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그리고. 글이라고는 다이어리 쓰는 게 전부인 내게 과제 퇴고를 떡하니 맡긴 너는 또 뭐고.

참말. 도긴개긴이다.



* 사진 출처 : 픽사베이, 문박사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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