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Jun 12. 2023

3년 차 커플,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우리의 결말이 이별일지라도


어느덧 그를 만난 지도 3년 차가 되었다. 만나는 3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20대 초중반 흔들리던 시기 속에 장거리 커플로 만난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으며 많이도 달라졌다. 몇 번의 위기도 있었다. 그때마다 한 명이 관계에서 기꺼이 을이 되어 노력해 관계를 회복해 왔다. 대부분은 그가 을이었고 내가 갑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을이 되었고 우리는 이별 대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시작부터 우리는 장거리 커플이었다. 같은 경기도인데 정 반대의 끝에 위치한 우리는 주말에 보려면 차로 꼬박 2시간을 달려야 만날 수 있었다. 우리의 위치만큼 상황도 정 반대였는데, 만나는 기간의 대부분을 나는 직장인으로 보냈고 그는 취준생으로 보냈다. 저녁에 퇴근하는 직장인과 저녁에 취업을 위해 학원을 다니는 취준생과의 연애는 참으로 고달팠다. 안정적인 연애를 하는 다른 연인들과는 다르게 우리에게 닥쳐오는 파도는 유난히 거세게 느껴졌다. 


그렇게 만나던 우리의 상황이 몇 달 전 반대로 바뀌었다. 나는 20대 후반이 되기 전 진로를 고민하기 위해 퇴사하고 백수가 되었고, 그는 드디어 갈망하던 사회초년생 직장인이 되었다. 나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그가 퇴근하는 시간에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좁은 방안을 벗어나 나아가고 있을 때 나는 점점 갇히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점 변했갔다. 매주 나를 보러 오던 그의 환한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나는 그의 표정에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서운해하기 시작했다. 그가 변했다고 생각했고 점점 더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나에게 숨통이 점점 조이던 그가 결국 나에게 이별을 뱉었다. 



첫 마음은 괘씸했다. 주변에서 호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의 가장 힘들 시절을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곁에서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내 상황이 안 좋아지자 바로 나를 버렸다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이전에도 그가 힘들 때 나를 버렸던 것이 생각나며 또다시 버려졌다는 사실에 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이별 후 스멀스멀 올라오던 불안을 담담히 달래 오던 내가 무너졌다. 


이후에는 확인하기 시작했다.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냐며 물었다. 질문에 "아니"라는 대답을 정해놓고 물어봤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고 확신하며 물었다.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아? 우리가 헤어지면 너는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어 그래도 괜찮아?"라고 당당히 물었고 그 대답에 내 예상과 다르게 "그만하자"라는 대답이 나오자 또다시 무너졌다. 


결국 나는 감정에 패배했다. 그날 밤 나는 감정에 휘말려 그에게 울며 전화를 했다. 제발 헤어지지 말자며 애원했다. 그는 혼자 삼켰던 이야기를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동안의 내가 제3자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뚜렷하게 보였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치닫은 내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그를 통해 회복해려 붙잡고 늘어졌다. 그가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변한 것은 내쪽이었다. 내가 그를 선택했으면서 우리의 과거를 무기 삼아 그를 휘둘렀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던 내가 그가 나를 외롭게 두었다며 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깨달아버린 나의 지난 모습들은 인정하기 싫게도 너무나 추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스스로 더 이상 추하고 비참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받는 사랑에 목말라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는 단단한 바탕이 되기로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직 사랑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회복하는 기간을 가지기로 했다. 그는 지친 몸과 마음을, 나는 스스로가 어딘가에 처박아버린 나를 되찾아오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평소처럼 연락을 한다. 자기 전 하루 한번 사랑한다고 통화를 하지만 만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결말이 결국에는 슬픈 이별일지라도 나는 이 관계와 상관없이 나를 회복해야 한다.  스스로 깨달아버린이상 나를 계속 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이라는 책에서 "혼자서 똑바로 설 수 있어야, 둘이 함께 설 수 있다"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이제 다시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기를 때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