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
3년 가까이 만난 남자친구와 시간을 가지기로 하고 서로 보지 않은지 3주가 지났다. 며칠 뒤면 우리가 약속한 한 달째가 된다. 주말이 되면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전에 홀로 떠나기로 했다.
뚜벅이가 갈 수 있는 여행지는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서울이 아닌 경기 북쪽에 사는 내가 서울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지역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서울을 거쳐서 가고 싶진 않았다. 나의 동네에는 아주 오래된 고속버스터미널이 있기에 오래 걸리더라도 천천히 그 자리에서 만끽할 수 있는 버스를 선택했다. 교통수단을 선택하니 갈 수 있는 지역은 한정적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그동안 가보고 싶었지만 미루고 미뤄뒀던 담양을 가기로 결심했다. 떠나기 전날 밤 급하게 에어비엔비를 뒤져 숙소를 예약하고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를 하고 떠났다.
담양까지 우리 지역에서 한 번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가려면 반드시 광주를 통해 가야 하는데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정해진 게 없으니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아쉬운 마음 없이 머물고 싶어 광주에서도 하루 머물기로 결심했다. 동네에서 꼬박 4시간 버스를 타고 달린 후 광주에서 버스로 갈아타 40분을 더 들어갔다. 비까지 추적추적 오니 마음이 더 잔잔해지는 기분이었다. 높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논과 밭,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내가 홀로 떠나왔음이 실감 났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30분을 걸어 골목길 안쪽에 위치한 한옥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숙소에 들어가니 길고양이들이 나를 반겼다. 작지만 아늑한 방과 널찍한 마당을 가진 숙소가 생각보다 너무 마음에 들었다. 분명 새벽같이 일어나 출발했는데 담양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다되어있었다. 더 늦기 전에 눈에 초록을 담으러 숙소를 잠시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왔다. 장마가 시작되었고, 이를 알고 있음에도 망설임 없이 여행을 떠난 이유는 하나 비 내린 죽녹원이 보고 싶어서였다.
높고 시원한 대나무와, 비에 젖은 흙내음이 이 여행에서 내가 원한 전부였다.
비 내리는 죽녹원을 홀로 걸으며 지도를 보니 죽녹원 내부에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다. 운수대통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사색의 길, 선비의 길. 나는 운수대통길을 지나 길을 선택하는 갈래에서 우습게도 사랑이 변치 않는 길을 선택했다. 길을 홀로 천천히 걸으며 마음속으로 조금은 바랬던 것 같다. 정말로 우리의 사랑이 변치 않기를. 서로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기를. 동화 같은 사랑을 꿈꾼다고 비웃을 그의 얼굴이 보였고, 나 역시 스스로가 조금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거짓말처럼 이 길의 이름대로 내가 걸을 수 있길 바랐다.
혼자 3만 원짜리 한우 떡갈비를 해치우고 숙소로 들어왔다. 대청마루에 앉아 책을 읽다 고양이를 무릎에 얹은 고양이와 함께 비 내리는 마당을 바라봤다. 고요하고 조용하다. 조금은 외로웠지만 그마저 받아들였을 때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된다는 여러 책의 구절을 떠올리며 외로움을 곱씹고 삼키고 넘겼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나에게 집중하면서 나를 채워나갔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감정과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고요하게 다져지고 있었다. 대청마루에서 따뜻한 차와 함께 빗소리를 듣는 동안 무너져버려 작은 바람에도 아프다고 외치던 내가 바람에 흔들리는 수많은 풀들을 보며 위로받았다. 묵묵하게 비를 맞고 바람에 흔들리며 제자리를 지키는 것들을 바라보며 나도 저리 단단한 뿌리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요 속에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초록을 좋아하고, 예쁜 가삿말의 노래를 좋아하고, 시원한 바람을 좋아하고, 작지만 아늑한 것과 혼자 조용히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그와 연애하며 잊고 있었다. 내가 이리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그와 만나며 나는 포기에 익숙해지고 아끼고 좋아하는 것들을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나 보다.
새벽이 되자 많은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새벽 4시쯤 되었을까. 한옥의 작은 별채에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니 마지 내가 바닷속에 빠진 것 같았다. 끊임없이 내리는 빗소리가 마치 파도소리 같았다. 방에 있는 <방명록>이라 적힌 작은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5시간이 걸려 도착한 이곳, 담양의 서원마을에서
몸도 마음도 무너져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던 제가 거센 비를 피하고
고양이들과 함께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을 바라보며
무너지던 마음을 조금은 추스르고 갑니다.
내가 푸르른 나무와 시원한 바람,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 혼자 사색하며 보내는 시간, 그리고 작은 생명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이곳에서 고요하게 나에 대해 고민하고 마음에 새기며 떠납니다.
훗날 또다시 마음이 지칠 때 이곳에서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오래오래 이 공간이 자리를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이 공간 덕에 비가 많이 오던 여름날에 원 없이 초록을 즐기다 갑니다.
그리고 글을 마친 후 그에게 편지를 썼다. 전하지 못할 말일 수도 있지만 나의 마음을 알기 위해 머리와 가슴속에만 있던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글로 적었다. 두서가 없더라도 그냥 적었다. 마음은 그를 그리워했지만,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끝은 이별이었다. 우리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몇 번의 이별에 망가져버린 우리 관계에서 나는 더 이상 그를 믿지 못할 것이다. 결국 나는 홀로 떠난 여행을 통해 나를 얻고, 그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