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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경훈 Dec 26. 2022

[문경훈의 역사이야기] 소현세자는 정말 독살되었나 3

영화 '올빼미'를 보고

2. 소현세자 독살설의 진상


  인조 반정 이후 명-청 교체라는 급변하는 국외정세에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였습니다. 교과서에 항상 등장하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인조가 실현하기엔 사실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광해군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저버렸다는 것이었거든요. 재조지은이란 명국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보낸 사실을 의미합니다.(나라를 다시 지을 수 있게 만들어준 은혜, 당시 사대부들이 명국의 참전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수 있는 용어입니다.) 결국 두 번의 호란(胡亂)이 발발하고 인조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바치며 청에 항복합니다. (정묘-병자호란에 관한 글은 다음에 다시 올리겠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소현세자의 이야기니까요.)


  항복의 조건으로 청국은 조선에 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들과 신료 등을 인질로 요구하였고 결국 인조의 장남이자 왕세자였던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직후 청에 인질로 가게 됩니다. 1637년에 청국으로 건너가 1645년에 귀국하니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질생활을 했습니다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겠죠. 문제는 귀국 후 두 달 만에 소현세자가 급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인조실록'과 '승정원 일기' 등의 기록을 살펴 소현세자가 급사하기까지의 진상을 살펴본 후, 소현세자의 독살설이 왜 제기되었나 알아보겠습니다.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족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이 알지도 못 하였다.
                                                                                 - '인조실록' 46권 23년 6월 27일 무인

  

  인조실록에 기록돼있는 소현세자의 염습(殮襲) 당시 모습입니다. 의학적 지식이 전무할지라도 수상한 죽음이긴 하죠? 그러나 '실록'은(당연히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우리의 기록유산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공신력을 담보할 수는 없습니다. 사초(史草)는 삭제되고 왕이 붕어한 후 편집의 과정을 거치며 그 과정에서 취사선택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선조수정실록'을 생각해 볼까요.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서인세력은 '선조실록'이 당시 집권하고 있던 대북세력에 의해 왜곡됐다며 재편찬을 재기하게 되는데 이렇게 '수정'된 실록이 선조수정실록입니다. 한마디로 집권세력인 서인-남인들 입장에선 중요한 사건들이 빠지거나 축소되거나, 사론(史論)이 적절치 못 하다고 판단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건 다분히 서인-남인들의 입장일 뿐입니다. 어떤가요, '실록'도 우리의 생각보다는 그렇게 객관적이지는 않죠? 사실 모든 역사의 기록이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의 사실을 살펴볼 때는 항상 다른 역사적 기록(사료, 유적, 유물 등)과 비교·대조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실록뿐만 아니라 '심양일기'나 '을유동궁일기' 그리고 '승정원 일기' 등 다른 사료를 함께 살펴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궤적을 그대로 쫓아가 볼 예정입니다.


  -다음 시간에-


모바일로 보기 편하도록 가급적 호흡을 짧게 글을 끊어내고 있습니다. 이해 부탁드리며 나중에 쭉 이어서 올리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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