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명분을 들어 일어난 신하들은 새 국왕을 '추대(推戴)'하게 됩니다. 추대란 모셔 받드는 것이죠.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가 그러했고(그러니까 이성계는 공양왕을 방벌하고 추대된 것입니다.) 중종(진성대군) 역시 그러했죠. 인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의 떳떳한 도리가 무너져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대의를 분발하고 내란을 안정시켜 자전(대비를 일컬음)의 위호를 바로잡은 후 이어 덕이 모자란 나를 추대하기를 원하였다... -인조실록 1년 3월 기사조
위 틀 안의 글은 인조의 즉위교서인데 '추대'란 두 글자가 보이시나요.(자전은 인목대비를 말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뒤에 서술하겠습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추대할 인물이 인조(능양군)밖에 없지는 않았겠죠. 분명 여러 후보들 중에 능양군을 '선택'하였을 것이고 인조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능양군은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의 장남이었고 형제로는 능원군, 능창군, 능풍군이 있었습니다. 광해군과는 이복형제였던 셈인데 동생인 능창군이 광해군에 의해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건이 있었고 이것이 악연의 시작입니다.)
반정을 논의하는 가운데 박미(1592~1645)라는 신하가 능양군의 추대를 반대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두고 후일 인조는 "이는 신하가 임금을 택할 때의 일이니 내 어찌 개의할 것인가"라며 그를 포용하였는데요. 이처럼 추대할 때 신하들이 왕을 택하고 왕 역시 이것을 당연히 여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신하들이라고 아무나 추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최종 의사결정권은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대비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장 조선의 태조부터 (형식에 불과했지만) 당시 고려의 대비였던 왕대비 안씨의 교서를 받들었어 공양왕을 폐하였고 중종반정 당시에도 왕대비 정현왕후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고 새 국왕을 승인받았습니다.
인조(능양군)가 반정으로 추대될 때는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능양군이 대비로부터 인정을 받기도 전에 인사에 관한 교서를 지으란 명령을 내리라고 한 일이 그것입니다. '교서(敎書)'는 국왕이 내리는 명령서니까 능양군은 인정도 받기 전에 왕 노릇을 먼저 한 셈이 되겠죠?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기에 능양군이 내린 교서는 곧장 철회되었습니다만 위호를 회복한 인목대비로부터 승인을 받는데 제법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어 사실상 대비의 지위를 상실했었습니다. 아들인 영창대군은 증살(쪄죽음) 당했고 본인 역시 엄청난 고초를 겪었죠. 기록에 의하면 반정군이 들어왔을 때도 반정이 사실인지 의심하였고 능양군이 와서야 믿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러한 경험들이 인목대비를 불안하게 했기에 인조 즉위부터 자신의 권위를 적극 과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형식적으로나마 왜 대비의 승인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왕의 폐출이나 새 왕의 즉위가 결국은 왕실 내부의 일이었기에 큰 어른인 대비의 의사가 가장 중요했고, 반정 세력 역시 기존 왕조의 질서를 충실히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정 이후에 쫓겨난 왕들은 필요 이상의 모욕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폐위된 왕일지라도 왕이었고 그들을 모욕하는 것은 자칫 현 왕조체제에 대한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의 반정은 특별한 사건입니다. 왕을 교체한 일이야 중국과 조선 이전의 역사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지만 반정과 같은 형식과 결과는 전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