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학교 교사의 퇴직과 그 후
퇴직에 대한 글을 쓰기에 앞서 케바케, 사바사 듯이 대안학교도 분명 학교마다 다를 것임을 알린다. 이 글을 읽을 누군가가 나의 일천한 경험으로 대안학교를 예단하지 않기를, 그저 참고용으로만 봐주었으면 좋겠다. 애초에 글을 쓴 목적도 구체적이 정보 전달이 목적이었을 뿐, 나는 지금도 대안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료 교사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즐겁게 일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며 응원한다.
좋은 곳이었다. 학교를 둘러싼 목가적이 자연환경은 그저 걷기만 해도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주었고, 아이들과 원 없이 뒹굴며 함께 할 수 있었다. 날이 좋으면 들판에 나가 책을 피고 같이 토론을 하다가 어느새 웃고 떠들고 장난쳐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핸드폰과 피씨방이 없는 곳에서 아이들은 하늘과 별의 아름다움을 알았고 풀과 동물과 노는 법을 스스로 배웠다. 달에 한 번씩 아이들과 길게 나가 때론 싸우고 때론 이끌며 나 역시 성장할 수 있었다. 공교육에서 교사들을 괴롭히는 존재로, 민원 공포의 대상이 되기 일쑤인 학부모도 그곳에선 동지이자 친절한 인생선배들이었다. 행정업무는 정말 최소한이었고 그나마도 간결했다. 행정업무에 쓸 시간을 수업개발,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채울 수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사업은 무엇이든 최소한의 절차로도 실행할 수 있었고 이는 당연하게 다양한 활동의 제공으로 이어졌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하고 싶은 수업을 했다. 다시 생각해도 행복한...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결국 아이들과 있는 시간을 빼곤 행복하지 않은 삶이었다.
아무리 아름답고 낭만적인 곳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곳은 학교였고 직장이었다. 교사는 학생들과도 관계를 맺지만 동료와도 관계를 맺는다. 내가 대안학교와 대안 교육을 향한 이상을 가지고 온 만큼 다른 교사들도 큰 뜻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나의 교육적 이상(혹은 가치관)이 동료와 반드시 맞으리란 법이 없다는 것이다. 공교육에서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가에서 정해준 울타리가 워낙 공고하기 때문에 넘을 수도 없고, 애초에 넘어서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공교육에서 동료란 가치관이 어찌 됐든 결국 나처럼 울타리 안에서 일하는 존재가 된다. 결국 어차피 넘을 선이 없으니 싸울 일도 크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안학교에는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이들이 흐릿한 경계 속에 놓여 있고 결국 이는 잦은 충돌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민주적인 의사소통 구조는 이러한 충돌이 가능하게 만드는 밑바탕이 된다. 물론 이러한 충돌을 밖에서나 내부에서나 교육적 차이를 바탕으로 한 가치관의 충돌로 아름답게 바라본다. 그러나 성인 군자들만 모인 곳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잦은 충돌은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혹은 사람에 대한 피로로 이어진다. 모순적이게 이해나 배려보다는 공격과 냉담 어린 시선이 대안학교에서 내가 동료들에게 느낀 것이었다.
나의 교육관은 기본적으로 많이 열려있는, 어쩌면 80년대 전교조의 그것을 닮아있다. 그러나 내가 있던 학교의 대부분의 동료들은 나완 달랐다. 나는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들도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만 그들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대안학교 교사의 삶은 육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고된 것이어서 아이들에게 줄 사랑만으로도 힘이 부친다. 처음엔 이것이 대안학교의 토론이라며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끼던 나의 투쟁은, 나도 모르는 새에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점점 사람을 미워하게 됐고 그들도 나를 미워할 것이라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럴수록 고립되며 악순환은 반복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잃어갔고 어느새 몸과 마음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더욱이 날 좌절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무리 목소리 내고 투쟁해도 '바뀌지 않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민주적이고 열려있는 곳이더라도 결국 직장이었다. 직장엔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고 원치 않아도 따라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생각한 대안교육의 형태와 학교가 다르구나, 이제는 모험보다는 안정을, 바꿀 것보다는 지킬 것이 더 많아진 곳이구나라고 생각할 때쯤 미움과 좌절을 넘어 내가 왜 이곳에 있을까라고 묻게 됐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찾아간 병원 검사에선 직장 내 스트레스 점수가 80점을 넘어간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안정권인 40점 대보다 2배나 높은 수치였다. 그럼에도 내가 남으려뎐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만 변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나를 잃어 갔다.
힘든 일과 많은 월급, 쉬운 일과 적은 월급이 보통 직업을 선택할 때 참고하는 요소들이라면 나의 경우는 힘든 일과 적은 월급이었다. 그래, 그 무렵 차라리 돈이라도 더 주면 참아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시도를 했지만 대안학교에서 더 많은 월급은 사치였다. 결국 아이들과 있는 시간을 빼곤 행복하지 않은 삶이었다. 아니 내 삶이랄 것도 사실 거의 없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던 동료 교사들이 하나, 둘 떠나갔다. 학교 분위기는 점점 더 목을 죄어왔고 숨이 막혔다. 여기까지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일련의 사태들이 벌어졌고 결국 나도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떠난 지금, 마냥 행복하진 않다.
떠난 지금 행복한가라고 물으면 꼭 그렇지는 않다. 여전히 아름다운 기억이 많이 있는 곳이고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나와보니 가진 장점이 너무 많은 곳이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몇 주전 퇴직한 다른 교사와 이야기하며 우리는 그랬다.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지만 그 아이들이 우리네 인생을 책임져 주진 않는다고' 그 말에 동의하기에 나왔고, 그 말에 동의하기에 난 아직도 대안학교에 있는 동료들을 존경한다. 다만 난 너무 큰 이상과 사랑을 가지고 갔고 그곳은 나를 품을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아니 내가 그들을 품을 여유가 없었다.
나의 이야기가 모든 대안학교 교사들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나 역시 다른 대안학교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만큼 대안학교가 가진 매력은 엄청나니까. 그러니까 누군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그저, 이런 교사도 있었구나라고 생각해 주길 바란다.
끝으로, 나를 사랑해 준 아이들과 내 소중한 지혜학교의 두 사람, 박영주 최지은 선생님의 행복과 안녕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