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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경훈 Apr 11. 2023

문경훈의 음주동행(音酒同行) 25

결국 봄

  다시 꽃 피는 계절이다. 어르신들은 봉오리만 보고도 이 꽃 저 꽃 잘도 아시던데, 난 꽃이라면 일자무식이라 꽃을 보고도 ‘이 꽃 참 예쁘다’ 한마디 내뱉는 게 끝이다. 그래도 나이를 먹어가니까 확실히 길가에 피어있는 작은 꽃이라도 관심이 가고 더욱 사랑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나도 어디서 꽃에 대해 제법 아는 체할 수 있는 멋진 어른이 될지도 모르겠다.


  꽃이 좋은 이유가 저마다 뽐내는 고운 색과 자태도 있겠지마는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향기에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꽃의 향기는 방향제에도, 섬유유연제에도, 탈취제에도, 직접 몸에 뿌리는 향수에도 그리고 입으로 마시는 술에도 빼놓을 수 없는 향이 되었다. 혹시 마시는 술에 향이 무슨 소용이냐 말할 사람에게 원래 술은 향으로 마시는 음료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목으로 넘기지 않아도 향으로만 취할 수 있는 음료가 바로 술이다. 잘 만들어진 와인에서 나는 화사한 꽃향기, 그 황홀함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한편 곡식으로 빚는 우리 술은 꽃향기보단 멜론이나 복숭아, 참외, 살구 같은 잘 익은 과실향이 도드라져 또 다른 기쁨을 선사해 준다. 곡주가 낼 수 있는 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을까? 잘은 모르지만 우리 술은 그래서 이전부터 다양한 부재료를 이용해 맛도 더하고 향도 더해왔다. 사계절 동안 피는 꽃들을 모아 정성스레 법제한 후 빚었다는 백화주(百花酒)가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전해지고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비롯하여 여러 사서에 등장하는 국화주, 송화주(松花酒), 꽃은 아니지만 연잎을 이용한 연엽주(蓮葉酒)와 연꽃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찹쌀로 빚은 술의 향이 연꽃과 유사했다는 하향주(荷香酒), 지금도 많이 생산되고 있는 진달래 두견주까지 다양한 술들이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부재료로 꽃을 이용한 우리 술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배상면주가의 ‘민들레 대포’나 진달래가 들어간 위에 얘기한 면천의 ‘두견주’, 홍천 미담 선생님의 ‘송화주’, 매화가 들어간 ‘연희매화’, 구절초꽃이 들어간 한통술의 ‘구절초 꽃 술’, 평택 좋은 술의 무궁화 증류주 ‘어차피’, 20여 가지의 꽃이 들어간 춘천 지시울 양조장의 과하주 ‘화전일취 백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목련향이 멋들어진 삼양춘 양조장의 ‘오 마이 갓’, 국화향이 가득한 자희향의 ‘국화주’나, 술아원의 ‘술아 국’, 석이원주조의 ‘자자헌’, 삼해소주의 ‘삼해 국’ 적으면서도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꽃술이 있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꽃술이라는 게 생각보다 꽃의 향기가 직접적으로 나진 않는다. 물론 술이 다 완성된 후에 가향(加香)한 경우라면 다르겠지만 보통에는 발효과정에서 꽃의 향기는 다 묻히게 된다. 그래서 향을 잘 살릴 수 있는 증류주나 원체 향기가 강렬한 국화와 송화를 이용한 꽃술이 많은 것이다. 


  일전에도 말했지만 사실 내가 생각하는 봄은 잔인하게 슬픈 계절이다.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나 브로콜리너마저의 ‘잔인한 사월’ 같은 곡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와 같다. 앞에 꽃에 관한 이야기를 실컷 했으니 BMK의 ‘꽃피는 봄이 오면’을 소개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이 노래도 이별 노래인걸. 오늘 소개한 꽃술들을 마셔본다면 알겠지만 봄의 상큼함과 푸릇함을 강조한 맛이지 사실 찐득하게 울적한 술들이 아니다. 그러니까 상큼하고 달큰한 꽃술처럼 겨우내 웅크린 마음을 활짝 피게 해 줄 봄노래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김현철이 쓰고 롤러코스터의 조원선이 부른 ‘봄이 와’. 지금은 롤러코스터를 아는 친구들도 거의 없지만 이효리의 남편으로 유명한 이상순이 활동한 밴드라고 이야기하면 조금은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난 조원선의 음색과 롤러코스터의 노래 모두를 사랑한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목소리 자체가 봄에 어울리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윤상과 함께한 ‘아무도 아무 것도’에서처럼 잔뜩 메말라 입술이 갈라질 것 같은 고목(古木)의 느낌이 짙다. 그래서 롤러스코스터 시절의 ‘last scene’나 ‘love virus’ 같은 노래가 그녀의 음색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그러나 김현철은 그녀의 음색을 이용해 절묘하게 봄노래를 만들어냈다. 메마른 그녀의 음색은 ‘봄이 와’에서 늦잠 후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듯한 나른함으로 다가오고 김현철의 멜로디는 기다려왔던 봄의 설렘을 생생히 전해준다.


  또 하나의 봄노래는 장필순이 부른 2011 월간 윤종신 4월 호의 ‘결국 봄’이다. 김현철도 마찬가지지만 윤종신이 얼마나 뛰어난 뮤지션인지는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다. 그가 장필순을 만났을 때 이렇게 아름다운 결과물이 나왔다. 코러스의 여왕, 포크계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인 그녀의 목소리는 도드라진 기교나 짜릿한 고음 대신 수수함과 그 수수함만큼이나 포근함을 무기로 삼는다. 윤종신은 그녀의 목소리에 가장 어울리는 가사와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둘의 시너지는 그렇게 봄의 따스함과 푸근함으로 청자를 감싸준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봄의 따스함과 설렘 대신 결국 내가 듣고 있는 노래는 장필순 3집의 ‘내가 좇던 무지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봄은 나에게 슬픈 계절인가 보다.

2011 월간 윤종신 4월호, ‘결국 봄’. 월간 윤종신은 많은 명곡을 남겼다. 달마다 한 곡 씩 발표하겠다는 윤종신의 구상과 실현, 그리고 명곡의 탄생은 그 자체로 윤종신의 천재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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