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주류 관련 제도 개정에 관하여
지난 25일 기획재정부에서 24년 세법 개정안을 발표했습니다. 우리 삶의 변화를 가져올 여러 내용이 담겨 있지만 그중 저의 관심사는 주류이니까, 그에 관한 짧은 단상을 남겨보려 합니다.
단상이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전통주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야 할 듯합니다. 한국 가양주 연구소의 류인수 소장님은 '전통주'란 용어가 현재 시장의 다양한 한국 술들을 포괄하기엔 범위가 좁으므로 '우리 술'이란 용어를 더 권장한다고 하셨는데 이번 글의 주인공은 '탁주'니까 편의상 '전통주'로 명명하겠습니다.
집집마다 손님접대와 차례를 위해 술을 빚던 가양주(家釀酒)의 시대는 일제강점기와 함께 쇠락하고 말았습니다. 일제가 세수 확보를 위해 1916년 주세령을 도입하였고 34년 법을 개정하면서 집에서 술을 빚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해방 이후에 전통주는 그 맥이 거의 끊겼고 70년대 막걸리는 '카바이드'가 들어가 심한 숙취를 유발하는 저질 술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던 것이 88 올림픽을 계기로 우리 문화의 조명이 이루어지면서 지금까지 이름난 경주의 법주나 면천의 두견주, 전주의 이강주 같은 술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통주의 부활은 그 이후로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직 매니아를 위한 술도 되지 못했으니까요. 2010년대가 돼서야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일본에 막걸리 붐이 일어나고, 다양한 전통주가 언론 매체를 통해 소개되기 시작하고 이른바 매니아들을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2020년대에는 이른바 '힙(hip)'함과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한 무언가를 찾는 젊은이들에게 전통주가 각광받았고, 코로나 시기 집술문화가 시작되며 전통주의 전성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집술 문화 시기에 와인과 위스키 등 고급 주류 시장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전통주 시장의 파이도 커진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부터 전통주 대신 막걸리로 범위를 한정 짓겠습니다.) 전통주 시작의 파이가 커지면서 시장엔 우수하고 다양한 막걸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지역의 쌀, 다양한 품종으로 빚은 술들은 물론 특별한 누룩으로 빚은 술, 고문헌을 토대로 복원한 막걸리 등 여러 순곡주(純穀酒)가 경합을 벌이고 이를 넘어 과일, 야채, 각종 허브류 등 부재료를 활용한 술들이 소비자를 찾아왔습니다. 새로운 술이 나올 때마다 시장은 열광했고 '새로운 맛'에 대한 호기심은 소비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경기 침체로 국민들의 소비가 위축되면서 전통주 업계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로나 시기 크게 성장했던 와인과 위스키 시장은 성장했던 폭만큼이나 크게 하락했고 그 여파는 전통주 시장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생산자들은 이제 새롭고 다양한 술을 개발하는 시도보다는 소위 '잘 팔리는', '대중적인 맛의' 막걸리를 시장에 내놓는 것이 더 안정적이라 판단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맛의 '획일화'를 가져왔습니다.
참고. 대한민국에는 술 빚기에서 양조장 창업까지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양대 교육기관 '한국 가양주 연구소(소장 류인수)'와 '한국 전통주 연구소(소장 박록담)'이 있고 현재 시중의 술들은 크게 '가양주 연구소 계'와 '전통주 연구소 계'가 있다고 보시면 쉽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저의 경우 바로 이 지점에서 막걸리에 대한 관심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출시 됐다는, 화려한 라벨과 설명하는 어떤 술들을 먹어도 결국 다 그 맛이 그 맛이었거든요. 몰개성과 획일화, 아주 소수의 술들을 제외하고는 소위 잘 팔리는 맛 일색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막걸리의 위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개구리가 웅크리는 것은 더 멀리 뛰기 위함 이랬던가요. 전통주 시장이 부활한 지 많이 잡아도 이제 겨우 20년, 교육자, 양조업자, 소비자 등 다양한 이들의 노력으로 짧은 새에 우리 술은 지금처럼 성장했고 소비자들의 격려와 질타를 받으며 언젠가는 시장의 주류로 발돋움하리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진짜 위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습니다.
25일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이제 막걸리엔 향료와 색소를 첨가할 수 있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안 됐냐구요? 네 안 됐습니다. 마트에 가면 '알밤막걸리'도 있고 '알밤술'도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향료와 색소가 첨가된 술은 제도적으로 '막걸리'란 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는데 이젠 이 기준을 변경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나나 막걸리로 예를 들어볼까요? 막걸리에서 바나나 맛을 내기 위해선 정말 생각보다 상당히 많은 양의 바나나를 넣어 술을 빚어야 합니다. 사실 그렇게 넣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바나나 맛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막걸리에 이제는 노란색 색소와 바나나 향료의 넣음으로 간단히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는 시중에 유통되는 막걸리 가격의 인하를 가져올 것이고 소비자들이 싼 가격에 바나나 맛의 막걸리를 마실 수 있을 테니 막걸리는 부활할 것이다. 이것이 정부의 논리겠죠? 그러나 이 논리대로라면 막걸리의 품질은 단연 저하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쌀, 물, 누룩만 가지고 막걸리를 맛있게 만들려면 생각보다 정성은 물론 쌀이 많이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이 때문에 시장에서 천 원대에 판매되는 막걸리와 3만 원 대에 판매되는 막걸리가 나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천 원대에 팔리는 막걸리를 살펴보면 대부분 팽화미를 사용합니다. 팽화미란 일종의 뻥튀기한 쌀입니다. 값싼 외국산 쌀을 뻥튀기한 후 일종의 배양된 효모(입국)를 이용하여 일단 알코올을 쉽게 만들어냅니다. 이후 부족한 단 맛은 '이소말토올리고당' 같은 당으로 메꾸게 되는 것이죠. 반면에 쌀, 물, 누룩을 이용한다면 술이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것은 차치하고 단맛을 내기 위해 많은 쌀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처럼 술을 빚기 위해 사용되는 원재료의 차이가 바로 가격의 차이를 불러옵니다.
누구나 싼 값에 좋은 술을 먹고 싶겠지만 사실 이는 불가능합니다. 대신 싼 값에 맛있는 술을 먹을 수는 있습니다. 정부의 생각은 싼값에 맛있는 술을 만들어 내고 시장의 선택을 받아라입니다. 그러나 이는 필연적으로 저품질 막걸리의 범람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옛날 '카바이드 막걸리'의 소동이 재현되고 대중들에게 막걸리란 언제든 쉽게 마실 수 있지만 고급은 아닌 술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겠습니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는 것이 뭐가 나빠?
여러분은 왜 와인이나 위스키는 온라인 쇼핑이 안 되는데 막걸리는 가능한지 아시나요? 막걸리는 '전통주'고 대한민국 정부는 당연하게 우리의 '전통주'가 성장하는 것을 돕기 위해 온라인 쇼핑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국빈 만찬 때 테이블에 전통주를 소개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24년 개정안 대로라면 전통주인 우리의 막걸리는 성장할까요, 쇠퇴할까요. 시장에서 차지하는 파이는 커질지 모르지만 품질은 저하될 것이고 이는 결국 그간 많은 이들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며 장기적으로 막걸리의 쇠퇴를 가져올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지금 전통주 업계에 필요한 것은 전통방식으로 술을 빚는 양조인들을 위한 더 폭넓은 지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잘 팔리는 맛'이 아닌 개성 있는 맛을 생산해 낼 테고 이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막걸리 맛의 경쟁이 결국 한층 더 깊어진 성장으로 이어지리라 봅니다.
오랜만에 남기는 글, 얼마 전 작고하신 고 김민기 선생과 음악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술에 관한 글을 먼저 쓰고 말았네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글이니 아무쪼록 이쁘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저와 생각이 다를 모든 분들을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욕설이나 비난이 아니라면 댓글에 그 어떤 의견도 좋으니 남겨주세요. 다음엔 오랜만에 음악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