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승범 교수와 오수창 교수의 논쟁을 중심으로
근 한 달 전 ‘광해군’에 관한 짧은 내용을 총 8항으로 요약하여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중 5항의 내용은 “광해군 대의 폐모론은 ‘충’이 우선이냐, ‘효’가 우선이냐의 성리학적 명분론을 둘러싼 대립이었으며 대북파를 제외한 당대의 유림들은 당연히 폐모를 받아들일 수 없었음”이었고 쓰레드에 꾸준히 좋은 글 올려주시는 청염 선생님이 충-효의 당대적 맥락에 관한 문제를 지적해 주신 덕에 계승범(서강대 사학과) 교수와 오수창(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의 논쟁을 공들여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쓰레드 시작부터 말씀드렸지만 전 전문 연구가도 아닐뿐더러 유학에 관해선 문외한과 마찬가지기에 본 논쟁을 소개해드리는 정도로 짧게 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처음에 내가 광해군 대의 폐모론을 ‘충’과 ‘효’, 성리학적 명분론을 둘러싼 대립이라고 소개함은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의 저술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것은 충이 먼저냐 효가 먼저냐의 싸움이었다.”(한명기, 「폭군인가 현군인가-광해군 다시 읽기-」, 『역사비평』, 1998, 181쪽.), “‘폐모 논의’를 둘러싼 정치적 파란 속에는 이처럼 ‘효가 먼저냐, 충이 먼저냐’의 첨예한 사상의 대립이 자리 잡고 있었다.”(한명기, 「광해군-외교의 ‘빛’과 내정의 ‘그림자’-」, 『한국사 시민강좌』, 2002, 70쪽.)
2021년 계 교수가 출판한 저서 『모후의 반역』에 오 교수가 비판(오수창, 「조선시대 대비 지위와 인조반정의 재검토-계승범 교수의 『모후의 반역』 비판-」, 『역사비평』, 2022)을 가하며 논쟁은 시작되었다.
저서에서 계 교수는 광해군 대의 폐모 논쟁을 ① <효의 대상인 국왕의 모후(인목대비)>가 ② <반역의 죄를 졌을 때, 즉 불충(不忠) 했을 때> 어찌해야 하는가를 두고 벌어진 것으로 보았다. 이후 벌어진 ③ <인조반정을 충-효의 대립에서 효가 거둔 최종 승리>로 보고 이후 조선이 가족 집단 내의 상하 위계질서와 결속을 국왕에 대한 충성보다 더 중요시하는 ‘효치국가’, 이상한 유교국가로 변화했다는 것이 계 교수 주장의 핵심이다.
이에 오 교수는 대비의 권위는 단순히 국왕의 모후라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것이었으며 ① <대비는 선왕의 배우자이자 왕실의 최상급자인 ‘왕실 서열 1위’의 권력자> 였다는 점, <대비와 국왕은 그 자체로 ‘군신관계’에 있었다>고 비판하고 <왕실 안에 효와 구분되는 충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폐모론의 본질은 ② 효·불효의 문제가 아니라 <대비의 지위를 부정하는 충역(忠逆)의 문제>라는 것이다. 한편 계 교수는 조선이 ③ 이상한 유교국가, 효치국가로 변화했다고 말하였지만 <효치국가에 대하여는 정의에 그쳤을 뿐 뚜렷한 실체는 제시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였고 계 교수가 가진 인조반정에 대한 부정 일변도의 인식이 위와 같이 그릇된 논거에서 비롯되었다 비판하였다.
오 교수의 비판에 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계승범, 「인목대비 폐위 논쟁과 인조반정의 명분-오수창 교수의 비판에 답함」, 『역사비평』, 2022) ① 폐모론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광해군의 사건 인식이 ‘효’>였으며 <당대의 신하(이원익, 유생들) 역시 광해군의 설득을 위해 ‘효’를 강조>하였다. 또한 모후인 <인목대비 역시 광해군의 행동>을 반역으로 인식하지 않고 <불효, 인리를 저버린 것으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당대 신하들의 입장에서 폐모론은 충역의 문제>였겠으나, <광해군의 입장에서 이것은 효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② 왕실 안에 효와 구분되는 충이 없다 하였는데, <두 가치(충-효)가 충돌함에 명유(名儒)들의 논평이 역사에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반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③ 광해군 축출의 주요 명분은 배명(拜命)과 폐모(廢母)였으나 병자호란으로 <배명의 명분이 무의미해지자 이후 조선의 유자들은 효를 절대 가치로 우세화하고 충의 현실적 개념은 상대적으로 약화되니 이상한 유교국가, ‘효치국가의 탄생’이라 제시>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 교수의 재비판(「계승범 교수의 「인목대비 폐위 논쟁과 인조반정의 명분」에 부치는 재비판」, 『역사비평』, 2023)은 간략히 소개하고 양측이 논지를 전개하는데 해석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 중국의 사료를 차후 소개하고자 한다. 오 교수는 이전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① 계 교수는 충-효의 이분법에 갇혀 조선 왕실의 세습군주제 원리를 놓쳤다고 본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줄곧 역괴(逆魁), 대역거적, 대역부도라 지적>하였다. 왕실의 권위가 중요한 조선에서 국왕의 역(逆)을 공식화하여 기록할 수 없었을 뿐이다. 반정 교서에서도 가장 먼저 인목대비의 정체성을 논하였고 <충효에 상관없이 명분은 대비 쪽>에 있었다.
두 교수의 논쟁을 간략하게 축약하였음에도 긴 글이 되었고, 최대한 간추리기 위해 이해를 도울 여러 내용을 빼먹어 ‘전달’이라는 목적에 부합하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이지만, 온라인상의 여러 전문가들의 보완을 기대해 본다. 특히 양측이 모두 중국의 여러 고사와 주희의 의견을 학설 전개의 주요 근거로 내세웠으니 사실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분량과 호흡을 고려하여 나중에 고사만 소개하는 식으로 다시 글을 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