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례2
1억 원의 채무를 갚지 않고 버티던 채무자 A가 상속 재산을 은닉했다. 엄마인 채무자가 아들 B 앞으로 자신의 상속 지분을 통째로 넘겨준 것이다. 상속재산분할 협의를 가장한 사실상의 재산 도피다. 채권자 C는 미리 확보해둔 판결문을 근거로 먼저 수익자인 아들을 상대로 더는 그 지분을 처분하지 못하도록 처분금지가처분신청을 단행했다. 채권자 C에 채무를 부담하고 있던 채무자가 자신의 상속 지분을 다른 상속자에게 넘겨주면 채권자는 강제 집행할 수 있는 권리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한다. 그러므로 채권자 C의 입장에서 채무자 A의 행위는‘사해행위(詐害行爲)’이다. 그 상속 지분을 넘겨받은 아들 B는 채무자인 엄마와 공모자이다. 이제 모자(母子) AB를 상대로 사해행위를 취소하라는 본안 소송을 제기할 차례이다. 다시 말해 모자가 채무를 면하기 위해 재산 도피 목적으로 넘겨준 지분을 엄마에게 되돌려놓고 상속 재산을 원상회복하라는 소송을 벌이면 된다.
이러한 경우, 아들 B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엄마 A의 상속 지분으로 이전받았던 등기를 말소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채권자 C는 엄마의 지분에 대해 강제집행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런데 채권자 C는 계속 뜸을 들이면서 본안 소송의 결행을 미루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본안 소송은 사해행위를 안 날로부터 1년 이내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그 기간을 ‘제척기간(除斥期間)’이라고 한다. 가처분 신청했을 때를 사해행위를 안 날로 기산하면 1년이 채 안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채권자는 소송의 번거로움을 피하고 소송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채무자 측과 협상을 시도하면서 본안 소송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그러던 와중에 채권자가 갑자기 사고로 입원하며 연락이 두절되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한 달여 지나 채권자가 퇴원 후 급하게 본안 소송을 제기하면서 기일 계산에 착오가 생겼다. 결국 제척기간이 도과되었다고 걸고넘어지는 채무자에게 사해행위취소 소송을 지고 말았다.
권리는 아무리 오만하고 시건방져도 시효의 손아귀 안에 있다. 제아무리 방자하게 굴던 권리도 시효 앞에 서면 왜소해지고 만다. 시효가 만료되면 증서의 주인은 권리자가 아니다. 그 증서는 폐지의 다름 아니므로 고물상이 그것의 주인이 된다. 시효를 넘긴 증서를 누군가 가져오면 나는 그에게 한마디로 선언을 한다. ‘이 증서에는 꼭 있어야 할 시효가 사라졌소’ 그러면 권리자는 그제야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 가슴을 후려친다. 그는 숨이 막히는 태도로 변한다. 자신의 실수가 너무 뚜렷해서다.
시효를 넘긴 증서는 칼로 도려낸 듯 구덩이가 깊이 파여 있다. 권리가 머물던 자리는 빈자리이다. 구덩이에 고여 있던 시린 바람이 권리자의 가슴을 쿡쿡 찌른다. 권리가 떠나 부패한 증서는 죽은 시신처럼 노려본다. 이해관계인은 중얼거리지만, 귀신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설사 신이 강림한다고 해도 시효를 넘긴 자는 궁지에서 끌어내 주지 못한다.
그가 이해관계인이라면 액면보다 기간을 신앙처럼 섬겨야 한다. 그런데 법의 문외한인 이해관계인들은 대개 액면만을 주인처럼 섬긴다. 권리는 기간이 있어야 했고, 법은 기간을 주었다. 기간은 권리자의 소홀로 증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머물던 자리를 떠나야 한다. 이해관계인의 과실로 증서는 죽은 몸이 된다. 자기가 모르고 한 것이지만 그를 곤경에서 구제해줄 사람이 법치 안에는 없다. 그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기간을 챙기라는 주의를 홀딱 삼켜버린 것이다. 시효가 끝날 때까지 액면만 곧이곧대로 믿었던 것이다.
금고의 불을 끄고 어둠 속에 묻혀 있어도 권리는 여전히 반짝인다. 시효가 남아있다면. 그것을 보관하고 있는 집이 무너진다고 해도 권리는 살아남는다. 시효가 남아있다면. 그러나 시효가 만료되면 커다란 말썽을 일으키고 울분의 씨앗이 된다. 집안의 상속인 중 누군가 그것을 발견한다고 치자. 고인이 막 떠난 안방의 다락방이나 장롱에서. 그들은 증서를 읽어보는 순간 깜짝 놀라서 나에게 가지고 오곤 한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일침을 놓을 뿐이다. ‘이미 때는 늦었소’ 그들이 그것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어루만져도 소용없다. 그것이 더는 파닥거리지 않는다. 더는 내일을 향해 날지도 못한다. 시효가 끝났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