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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열아홉에 6.25를 만났다. 어머니가 살던 석산골은 내장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의 요새 중 하나였다. 국군의 소거 작전으로 솥단지 하나 들고 쫓겨나온 외삼촌은 어린 누이들을 데리고 정읍 시내에 피난민으로 터를 잡았다. 피난살림은 어떻게든 딸린 식구 하나라도 줄여야 했다. 꽃다운 나이 스물에 어머니를 서둘러 혼사시킨 이유였다. 전쟁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부로 맺어준 것이다.
변변한 교통수단이라고는 없던 전후戰後, 수완이 좋은 외삼촌은 마차사업으로 돈을 벌었다. 시내에서 변두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주요 무대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말고개라고 불리는 언덕이다. 외삼촌과 말이 통하던 아버지는 그를 따라 말을 부리는 사업에 손을 대기로 했다. 아버지는 농사일을 접고 도회지로 이거를 했다. 마차사업을 좌우하는 건 말 그대로 말이었다. 그런데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말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사달이 났다. 말은 회복을 못하고 사료 값만 빚으로 남겼다. 한동안 사업주 노릇을 하던 아버지는 다시 빈농으로 전락할 위기에 봉착했다.
마차사업이 망하고 다시 망산 마을로 낙향한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곧장 강원도 벌목장으로 떠났다. 부양 가족을 떼어놓고 혼자 떠난 길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혼자 돌봐야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고 뒤늦게 한글을 뗐다. 춘향전 같은 언문 소설이 교본이었다. 아버지한테 글을 배운 어머니는 책읽기에 취미를 붙였다. 아버지 없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책에 매달린 것이다. 아버지가 강원도에 머물 때다. 호롱불 아래 책을 읽던 어머니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아이들이 호롱 옆에서 장난을 치다가 화상을 입었다. 그 일을 계기로 어머니는 읽던 책을 불태우고 다시는 책을 잡지 않았다. 아버지가 알게 되면 경을 칠 일이었고, 어머니 스스로 징계를 한 거였다. 어머니는 미술을 전공한 형의 작업에 대해서는 퍽이나 관심을 보이지만, 책을 다루는 내 작업에 대해서는 짐짓 모른 체하신다. 그 옛날 새끼들에게 화상을 입힌 사건이 책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을 굳게 닫아놓은 것이다.
아버지는 벌목공을 해서 벌어온 돈으로 빚을 갚고 나자 난데없이 시골집을 팔자고 나섰다. 돈도 안 되는 농사일을 접고 삼거리 쪽으로 나가자는 거였다. 안동네에서 불과 삼백 여 미터 거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신식 극장이 들어서고 방앗간이 돌아가고 이발소와 담뱃가게가 새로 생겨나며 삼거리 일대는 번화가로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결단을 뜬금없는 객기로 치부하고 극구 만류했다. 마차사업의 부침을 지켜본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를 물리치고 아버지는 전 재산인 논 서마지기를 팔아 삼거리에 터를 잡았다. 굴삭기나 덤프트럭 같은 쓸 만한 중장비 하나 없던 석기 시대였다. 아버지는 동네 아저씨들과 지게질로 흙을 퍼 나르고 돌덩이로 땅을 다져 초가 한 채를 맨손으로 지었다. 그런데 준공을 얼마 앞두고 아버지가 뜻밖의 중병을 얻었다. 자리에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어느 하루 큰아버지 손에 이끌려 김제의 용하다는 병원을 다녀왔다. 병원에서 돌아온 큰아버지는 몰래 혼자 울었다. 진찰결과를 묻는 어머니의 물음에 아버지는 투덜거렸다. 병원에서 별 말 없이 소화제만 잔뜩 지어주더라고. 아버지의 병세를 큰아버지만 알고 아버지에게는 숨긴 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은 누설되고 아버지의 시한부 선고는 모두에게 알려졌다. 아버지를 좌절시켰던 말처럼 아버지는 끝내 회복을 못하고 어머니에게 빚만 남기며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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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상중인데 매수자를 자처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버지의 체온이 채 식기도 전이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양, 당장 집을 내놓지 않으면 나중에는 팔기도 어려울 거라고 겁을 주었다. 그들에게 선의는 없었다. 홀로 남은 미망인의 궁박한 사정을 이용하려는 악의였다. 어머니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들의 섣부른 제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시신이 아직 집에 있는데, 미망인의 슬픔에 동참하기는커녕 가장의 죽음을 기화로 집을 싸게 먹으려는 그들의 저의에 혀를 내둘렀다. 집이 안 팔려도 좋고 굶어죽어도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걱정들 말라, 어머니가 쏘아붙였다. 미망인의 기세에 눌려 그들은 물러갔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삼거리에서 재도약을 노리던 가족의 꿈은 붕괴되었다. 가장의 죽음은 가난을 불러왔다. 남매들이 품고 있던 꿈도 탈탈 털렸다. 가난이 우리 집을 폭격한 것이다. 어머니는 장례식을 치르기 무섭게 점방 문을 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렵게 잡은 단골이 하나둘 떨어져 나갈지 모르니까. 아버지에 대한 추모보다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다급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건넌마을 사채업자한테 일수 돈을 끌어다 썼다. 별다른 유산이 없으니 일수를 기반으로 삼은 것이다. 그 돈으로 점방에 물건을 채우고 남는 수익금으로 높은 이자를 갚아나가며 버텼다. 일수는 어머니에게 담보 없이 근심을 덜어준 은인이었다. 하지만 매일 갚지 않으면 안 되는 일수는, 어머니에게 근심의 진원지였다.
가난한 점방의 미망인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주변 사람들은 두 부류로 갈렸다. 한쪽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아버지를 추모하고 그의 빈자리를 메워 어머니를 도우려는 이웃들이었다. 다른 한쪽은 아버지의 부재를 노리고 그 빈자리에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려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가 산으로 거처를 옮겨 떠날 때 만삭이던 어머니는 혼자 몸을 풀었다. 새 식구인 막내가 우리 곁으로 왔다. 아버지와 막내가 순차적으로 만남과 이별을 우리에게 안겨 준 것이다. 어머니는 유복자인 막내를 키우고 점방을 여느라 아버지의 슬픔을 누릴 겨들이 없었다. 보다 못한 동네 사람 몇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어머니와 호형호제하던 석전댁과 독대동댁, 흔랑댁이 그들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밀린 빨랫감을 자진해서 도맡아주었다. 세탁기도 없고 수돗물 한 방울 없던 때다. 동네에 하나 뿐인 공동우물에서 방망이와 맨손으로 해결했다. 품삯은 없었다. 두터운 인정으로 정산한 거였다.
어머니의 그 영웅들이 나이 때문에 건강을 잃고 하나둘 떠나갈 때마다 어머니는 며칠이고 숟가락을 내려놓은 채 잠을 설치곤 한다. 어머니인들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마는.
어머니는 점방을 애지중지했다. 손님들은 대개 농민과 노동자, 소상공인이었다. 그들에게 어머니의 점방은 마트였고, 사교클럽이요, 카페였다. 없는 것만 빼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 땀을 식히는데 필요한 잡화는 다 있었다. 마감 시간이 따로 없어 새벽이고 밤중이고 손님이라고 찾아오면 맞아야 했다. 점방은 좀처럼 문을 닫는 일이 없었다. 몸이야 피곤하지만 논농사뿐인 시골에서 외상만 없다면 돈벌이로 괜찮았다. 하지만 시골이라 점방에 오는 손님들은 외상을 원했다. 외상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현금이 궁하던 시절이라 외상을 안 주면 안 먹었다. 우선 파는 것이 급선무였던 어머니는 외상을 깔았다. 계산기도 없던 시절, 구구단도 배우지 못한 어머니는 주먹구구식 암산으로 장부를 정리해야 했다. 장부는 외상을 기록해둔 어머니의 난필로 너덜너덜했다. 추수 때가 되거나 명절이 가까워야 장부의 주인공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점방의 수지는 현찰의 수수 여부로 귀착됐는데 누적되는 외상은 운영난을 부추겼다. 게 중에는 외사촌 당숙뻘이라는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몇 가마니 값이 넘는 술값-지금으로 치면 기백만 원에 이르는 금액-을 떼어먹고 객지로 떴다. 일가친척이랍시고 도와주기는커녕 외상이라고 마구 퍼마시고 입을 싹 씻은 것이다.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하나 더 있다. 윗동네에서 점포를 한다는 남자다. 그는 술값을 재촉한다고 술상을 뒤엎고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깽판을 치기까지 하였다. 어린 막내가 보다 못하여 그 남자를 죽여버리겠다고 나섰다. 어머니는 외상값을 포기하고 그 남자를 돌려보냈다. 어머니의 고육지책이었다. 유복자인 막내는 어머니의 자산목록 1호였으므로, 그깟 외상값 때문에 막내를 조금이라도 다치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삼거리 일대를 주름잡던 극장은 TV의 등장으로 문을 닫고 정부양곡 창고로 변신했다. 추수가 끝나고 나락을 공판장에 내는 수매일이 되면 점방은 중년의 남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농산물 검사원에게 자신의 나락이 등외 판정을 받은 농민은 분기탱천했고 막걸리는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발이 넓은 이장의 빽으로 검사원과 내통하는 장면이 눈에 띄기도 했다. 그 현장에도 막걸리는 빠지지 않았다.
점방에 손님들이 몰린다는 소문이 나자, 어머니의 친정집 먼 친척이 홀로 된 어머니를 돕겠다고 자청하고 찾아왔다. 점방에서 푼푼이 모아온 어머니의 목돈을 집에 두지 말라고 조언했다. 곗돈으로 이자를 키워주겠다고 장담하며 어머니를 홀렸다. 경험이 일천한 어머니는 친정 일가라고 하니 그 여자를 믿고 돈을 맡겼다. 하지만 그 여자는 어머니의 돈을 들고 서울로 야반도주했다. 그 돈만은 어머니도 포기할 수 없었다. 큰 딸 혼수 자금으로 모은, 피 같은 돈이었다. 어머니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갔다. 친척들에게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그 여자를 찾아냈다. 그 여자는 어머니의 종자돈으로 자기네 집을 짓고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차마 친정 일가 일을 법에 맡길 수 없던 어머니는 배 째라고 버티는 그 여자를 어쩌지 못한 채 겨우 차비만 받고 돌아와야 했다. 그 일로 화병이 든 어머니는 한동안 몸져누워 지냈다. 돈도 돈이지만 친정 일가붙이가 자신을 속여 먹은 것이 분해서였다. 어머니는 이렇게 저렇게 떼인 돈을 다 받아냈으면 어엿한 집 몇 채를 샀을 것이라고 회고하곤 한다.
어머니는 점방에서 술을 팔면서도 자신의 입에는 술을 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점방을 그만둘 때까지 어머니의 몸에는 술 냄새가 뱄다. 그 냄새가 어린 우리를 먹여 살렸다. 점방에 딸린 방은 온 동네 사랑방이었다. 저녁이면 어머니와 같은 처지의 과수댁을 중심으로 점방을 채웠다. 그녀들은 화투로 다음 날의 운수를 점쳤다. 패가 안 좋으면 혀를 차며 내일을 미리 한탄했다. 화투를 이끄는 건 담배였다. 점방은 담배 연기가 걷힐 날이 없었다. 나는 그 연기의 틈바구니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어른들의 문화를 접했다. 때로는 음담패설을 뒤섞은 추태를 엿보기도 하며 그들의 어두운 일면을 누구의 제지도 없이 관람했다. 점방은 나에게 학교 밖의 학교였다. 나는 점방을 통해 일찌감치 교과서 밖의 인생을 청강한 것이다. 은둔형으로 타고난 나는 누구나, 아무 때나 드나들어도 되는 점방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호구지책으로 삼고 있는 어머니한테 그런 내색은 금기였다. 나이로 치면 점방은 나보다는 몇 년 연하였다. 점방이 열 살 쯤 먹었을 때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나는 점방을 겉돌며 암실 같은 골방에서 선생님이 떠안겨준 윤리를 팽개치고 자위나 해대곤 했다. 자위는 한때 나의 그늘 속에서 나와 같이 성장하며 나를 사로잡았다. 어머니는 나를 양지로 보내려고 술을 파는데, 음지에 숨고 싶은 나는 자위를 하며 울적해지는 나를 자위하곤 했다.
어머니는 경위야 어찌되었든 일단 점방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퍼주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고객이 아니라 과객이나 식객일지라도 차별을 안 두었다. 먼 전라도 땅으로 비단을 팔러온 대구댁은 어머니의 풋풋한 인심에 홀딱 반해서 농한기가 되면 점방에서 한 겨울을 나곤 했다. 심지어는 옛 애인을 수소문하여 찾아온 퇴임한 역장의 딸에게도, 인천의 어느 공장에서 헤어진 연상의 공순이를 만나러 내려온 어린 공돌이에게도 선뜻 골방 한 칸을 내주었다. 막차를 놓친 그들의 사정을 헤아려 잠자리와 밥을 주었을 뿐 돈은 한사코 거절했다. 점방의 신세를 잊지 못한 그들은 한동안 왕래를 하다가 나이 때문에 더 이상 오갈 수 없게 되자, 간혹 어머니와 서로 전화를 붙들고 다 지나간 일들을 재소환하며 울먹이곤 했다. 그들 사이에서 그리움의 패권을 거머쥔 어머니는 시간이 갈수록 권위가 살아나는, 추억의 오래된 군주였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장례식 날을 빼고는 오열할 틈이 없었다. 대신 새 식구로 우리 곁에 온 막내가 울었다. 절망을 불러오는 어머니의 오열과는 달리 막내의 울음소리는 잠깐씩이나마 우리에게 웃음을 불러왔다. 딱 한번 아버지의 유택 앞에서 목격한 적이 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큰 소리로 울었다. 무덤을 지키는 애먼 풀을 쥐어뜯으며. 그날 이후 어머니의 눈물바람은 종적을 감추었다. 자신의 여성마저 내려놓고 삶의 투사로 변신한 어머니는 타인들의 시선 따위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깔아뭉개는 거였다. 생활의 최전선 삼거리에 자리잡은 어머니의 점방은 궁기를 막아주는 참호였고 밥을 보급해준 병참기지였다. 어머니의 주적은 생계였다. 엄동설한의 시린 빨래를 도맡아준 이웃들이 어머니의 아군이었다. 그들의 엄호를 받으며 어머니는 생계와의 전투에서 우리의 끼니를 지켜냈다. 그렇게 점방을 자신만의 세계로 구축했다.
삼거리를 지키던, 점방은 이제 없다.
중년의 어머니는 추억으로만 존재한다. 삼거리는 아직 그대로인데, 북적거리던 사람들은 하늘로, 땅속으로 자신들의 무대를 옮겼다. 남아 있던 젊은이들은 거개가 객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극장도, 이발소도, 만화방도, 담뱃가게도 문을 닫았으므로 그들은 마음 놓고 떠났다. 동네를 나고들 때 모두의 정거장이었던 점방은 어머니 혼자 먹고 혼자 잠드는 여염집이 된지 오래다. 모두들 떠났는데...... 어머니는 아직도 그곳에 진을 치고 있다. 누구나의 추억이 은신하고 있는 그곳에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데...... 어머니는 아직 거기서 그 무엇인가, 그 누구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굴복된 적이 없이 말이다. 진즉 해가 저물었는데...... 여직 문도 닫지 않은 채 마당을 서성이고 있다. 추억 속의 점방은 그대로 있고, 어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속해, 느리게 조용히 늙어 가는데...... 내가 속한 여기의 우리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떤 세계를 향해 끝없이, 빠르게, 앞 다투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