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체
여든아홉 노인이다. 무남독녀를 혼자 길러냈다. 자신이 일군 땅을 외손자에게 물려주려 한다고 의뢰해서 찾아갔다. 등기권리증이 없으면 법무사와 대면해서 손도장을 찍고 확인서면을 만들어야 하는데 노인은 누워 지내는 중환자였다.
읍내 속에 숨겨놓은 오지처럼, 갓길에 주차하고 골목을 돌고 돌아 산을 넘고 넘어 도달했다. 중년의 딸이 마중을 나왔다. 집은 허름하지만, 부녀가 내놓는 미소가 값져 보인다. 녹록치 않았을 삶에 찌들었을 법도 한데 그늘을 허용하지 않는 얼굴이다. 노인과 딸은 서로를 단단한 사랑으로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엄마의 얼굴조차 모른다고 대답하는 딸의 눈이 잠깐 젖어 보였다. 노인을 데려가기 위해 집 주변에서 맴돌고 있을 죽음의 동태를, 노인의 병세가 대변하고 있다. 지금처럼 화사한 봄이 몇 번이나 더 노인을 찾아줄지….
누워 있던 노인이 낯선 방문자를 향해 천천히 돌아보면서 자신의 웃음을 방석처럼 내주었다. 강퍅한 마음일랑 벗어놓고서 여기 그만 앉으라고. 외진 데라서 쓸쓸한 얼굴일 것으로 예상했던 내 선입견은 노인의 미소 한 방에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바깥세상은 욕심으로 어지러운데 부녀 둘이서만 남다른 행복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요양사인 딸이 다른 집 노인들을 돌보고 오는 동안 노인은 방안에 틀어박혀 담장 너머 새소리나 산짐승의 발소리로 딸의 귀가를 연상하며 소일한다고 했다. 행복한 어조로 서술하는 부녀의 역정歷程을 경청하며, 일찍이 아버지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온 나는 질투하는 나를 발견했다.
절차를 설명하고 서명을 받는 요식적인 시간이 너무도 짧게 느껴졌다. 나는 잠깐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욕심이 발동하여 업무 외적인 질문을 자꾸 꺼냈다. 부녀와 대화를 마치면 다시 시끄러운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내가 가여운 나머지,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부녀는 모르는 것 같다. 이곳으로 처음 출발할 때는 볼일만 보고 빨리 돌아가야지 했는데, 막상 부녀 옆에 도착한 다음부터는 더 있고 싶어 변덕을 부렸다. 부녀가 함께 접어서 건네는 한 장의 미소가 내게 도착한‘편지’같았기 때문이다. 오래전 내게 부쳤으나 이제야 도착한 편지를 나는 읽고 또 읽고 싶어진 것이다. 그동안 나는 왜? 이런 외진 곳에 따뜻한 사연이 묻혀 있는 줄도 모른 채 소란한 도시에서 차가운 법전만 뒤지고 있었을까.
돌아오면서 나를 추궁했다. 꼭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해도 노회했던 지난날처럼 그런 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시계를 죽여서라도 나만의 시간을 살리라고. 그래야 부녀 같은 형식으로 새로 도착할 또 다른 행복의 계시를 알아볼 수 있을 것 아니냐고.
어쩌면 삶이 나에게 행복의 정체를 알려주려고 이곳으로 유인했는지 모른다. 행복은 결코 찾아볼 생각조차 못하는 낮은 장소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말이다. 외딴집을 무대로 부녀가 내게 보여준 한 편의 다큐는 나를 위로하는 동시에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동안 나는 나에게는 잘살고 있다고 거짓말하고, 타인들에게는 내가 행복한 적이 없다고 거짓말했다.
나는 언제부턴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심지어는 나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져 있다. 그런데 잠깐이지만 부녀의 외딴집에서 내게 돌아간 나를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