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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 느낌 그대로 Jul 08. 2023

성실하나 적극성이 부족함

과거의 기억을 들춰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오래 잊고 지낸 과거가 오늘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해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를 열람하고자 한다면 우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이다. 내 기대와는 너무도 다른 과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괜히 과거를 들여다봤다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호기심은 과거를 들여다볼 기회를 외면하지 못하게 한다.


정부24에서 초중고 생활기록부(생기부)를 열람했다. 갑자기 왜? 구체적인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 어쩌다 보니 정부24에서 초중고 생기부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와서 과거의 기록을 들춰보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냐 싶지만 지난 12년 동안 담임 선생님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했을지, 그 문장들을 읽어 보고 싶은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생기부에는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었다. 나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다른 학생들에게도 있을 것 같은, 복사 붙여넣기한 느낌이 나는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표현 속에서 과거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생기부는 달랐다. 그중에서도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내게 남긴 문장들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이런 문장들이라면 타인의 눈으로 본 나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행동 특성 및 종합 의견(3학년)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며 자주적 생활 자세는 바람직하나 남자다운 면이 다소 부족함.


아무래도 3학년 담임 선생님은 나를 싫어하셨던 것 같다. 이 선생님이 쓴 다른 문장들 속에서도 동일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학생은 어떠하나 저러하다.'

모든 문장들 속에서 역접 관계의 접속사 '그러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나에 대해 되도록 긍정적인 문장만 남기려고 한 반면 이 선생님은 유독 단점이 부각되는 방식의 문장만 남겼다. 역접 접속사에는 강조 기능이 있어서 아무리 장점을 여러 개 나열했다고 해도 역접 접속사 뒤에 단점이 부각되지 않는 건 아니다.


기분은 좀 나빴지만 이 선생님이 나를 보는 눈만큼은 정확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선생님이 내게 남긴 문장들을 한 문장으로 써보자면,

'성실하나 적극성이 부족함'

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지금도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실하나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1인분’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많이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고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먹으면 불쾌함이 느껴지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싶어도 내 팔이 닿는 곳까지만 만질 수 있고, 아무리 빨리 달리고 싶어도 내 다리가 허용하는 범위까지만 내딛을 수 있다.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적극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적극적이지 않다고 해서 내가 소극적인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적극적이지도 소극적이지도 않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나다.


선생님의 표현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체로 사실이기에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그저 내가 자라온 환경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누나 셋과 함께 자라서 보통 남자아이들과는 다른 환경 속에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누나들은 가족이지만 친구이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서 친구는 성별로 구분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자, 남자는 남자끼리만 여자는 여자끼리만 어울려 놀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고, 이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었다. 왜 학교에서는 남자아이들끼리만 어울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야 한다고 해서 따랐으나 내 마음은 늘 불편한 상태였었다.


남자다운 면이 다소 부족하다는 문장은, 내가 숨기고 싶었던 부분을 들춰내 망신을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문장은 초등학교 3학년 짜리 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가혹해 보인다. 어느 정도 자아를 확립한 지금이야 괜찮지만 어렸을 때 이 문장을 읽었다면 크나큰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선생님은 이 표현이 내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걸까.


선생님이 생각한 남자다움이란 어떤 거였을까. 남자가 남자다워야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와닿지 않는다. 이를테면 조용히 책을 읽기보다 다른 아이들과 뛰어놀거나 축구를 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바른 말보다는 모든 말에 '존나'를 섞어 써야 한다는 걸까? 마찬가지로 조신하게 행동해야 여자다운 건가 생각해 보게 된다. 선생님이 너무나 무책임하게 써놓은 표현에 망연해진다.




사람의 성격을 특정 언어 속에 가둬버리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예를 들어 혈액형에 따른 성격이 있다. 진짜 말도 안 된다. 사람의 성격을 A, B, O, AB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물론 혈액형에 따른 성격 분류를 믿는 사람에게도 그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성격이 이러했는데, 알고 보니 그 혈액형이더라, 혈액형별 성격이 정확한 것 같더라 식일 것이다. 나는 그가 믿을 대상을 찾고 있었던 거라 여긴다.


요즘도 사람의 성격을 특정 언어 속에 가두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이른바 마이어스 브릭 유형 지표(MBTI). 이번에는 사람의 성격을 16가지로 구분했다. 혈액형별 성격과 별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뭐가 됐든 이런 식의 성격 구분은 그냥 재미로 하는 거지, 결과를 맹목적으로 신뢰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MBTI는 본인이 항목을 읽어보고 선택한다는 점에서 혈액형보다는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문적인 검사가 아닌 건 마찬가지다. 듣기로는 상대방의 MBTI만 듣고서 이 사람이 나와 잘 맞을지, 안 맞을지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정말 뭔가를 믿고 싶은가 보다. 그 간절함 만큼은 인정한다.


MBTI에서 가장 첫 번째로 언급되는 척도는 '주의 초점'이다. E와 I로 나눠지는데, E는 extroversion, 외향적인 성격을 말하고, I는 introversion, 내향적인 성격을 말한다. 하지만 E라고 해서, I라고 해서 평생 그 성격으로 고착화되는 건 아니다. E인 사람도 얼마든지 I가 될 수 있고 I인 사람도 얼마든지 E가 될 수 있다. 또한 E가 아니라고 해서 I인 것도 아니고 I가 아니라고 해서 E인 것도 아니다. E와 I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MBTI를 재미로만 해야 하는 이유다. 사람의 성격을 무 자르듯 완벽히 나눌 수 없다.


외향적인 사람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내면의 에너지를 회복하는 반면 내향적인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내면의 에너지를 회복한다. 나 또한 대표적인 I 성향인 사람으로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그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다. 이런 나에게 있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오히려 에너지를 회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충격 그 자체였다. 마찬가지로 외향적인 사람도 내향적인 사람을 보며 신기하다 여길 것이다. MBTI는 나와 다른 성향의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알려준다. 이것이 요새 MBTI의 인기에 고마운 점이다.


내향적인 사람보다는 외향적인 사람을 선호하는 게 우리나라 사회였고 지금도 그러한 듯 보인다. 적극적으로 자기를 어필하는 사람, 사람들과 활발하게 잘 어울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필시 우리나라 조직문화에서 환영받는 인재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외향적이지 않은 사람,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외향적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라는 요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다른 성향이 되라고 하는 것은 고문에 가깝다. 그러나 MBTI의 첫 번째 척도가 '주의 초점'인 덕분에 이제 내향적인 사람도 스스로의 성향에 대해 밝히는 것에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다. E뿐만 아니라 I도 함께라는 걸 알게 된다.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며 자주적 생활 자세는 바람직하나 남자다운 면이 다소 부족함.


남자답지 못한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답지 못한 여자는 여자답게 고쳐야 하는 걸까? 남자답지 않고 남자답지 않지도 않은, 그사이에 낀 사람들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다양성이 없는 획일성은 죽음이나 다름없다.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정확하게 본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세상은 남자다움, 여자다움, 외향성, 적극성만 좋은 것으로 여기던 그때와는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비록 우리 사회에서 좋다고 여기는 적극성을 지니지 못한, 남자답지 않은 남자라고 해도 나 나름대로 사회에 기여하면서 살고 있다. 특정 언어로 사람의 성격을 가둬버리는 건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이게 아니라고 저게 되는 게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사이에 놓인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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