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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 느낌 그대로 Oct 02. 2023

○○ 대학교 출신 특징

1.

훈련병 때 있었던 일이다. 내가 소속된 1소대와 바로 옆에 붙어 있었던 2소대에는 ○○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한 명씩 있었다. ○○ 대학교가 명문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누가 어느 학교에 다니든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나로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하지만 몇몇은 그 둘이 ○○ 대학교에 다닌다는 걸 알고,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 '학교'가 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쳐야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 소대의 ○○대 학생 A는 평소 말수가 없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도 자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의무실에 갔다 온 다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며칠 뒤에는 그가 훈련소를 퇴소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A의 옆자리에서 먹고 자던 훈련병 말로는 그에게 심한 항문 질환이 있어서 그 치료를 위해 퇴소를 하는 거라고 했다. 그냥 아파서 퇴소하게 됐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A의 퇴소가 항문 질환 때문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그 질환이 치질이 아니겠냐는 소문이 나돌았다. 항문 질환이라고 해서 꼭 치질도 아니고 치질이라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것도 없지만, '치질'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에 그의 퇴소에는 어딘가 우스운 느낌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 소대의 유일한 ○○대 학생은 훈련소를 떠났다.


훈련 막바지 즈음이었다. 담당 교관이 2소대 생활관으로 모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 무슨 귀찮은 일을 시킬까 싶어 멍 때리고 있는데, 교관의 두 손엔 과자 봉지가 들려 있었다. 예상치 못한 과자 파티였다. 민간인들이나 먹는 진귀한 과자에 정신이 나가버렸다. 몽쉘의 달콤한 맛을 한참 즐기고 있는데, 2소대 ○○대 학생 B가 모인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 말하기 시작했다.


"○○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두 부류로 나누어져."

2소대에는 B를 신봉하는 자가 이미 여럿 있었다. 그들은 B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그게 뭐냐고 물었다.

"1소대에 치질 걸려서 나간 애 있지? 그런 애가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나 같은 사람이야."

B를 신봉하는 자들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대체 어디가 웃겨서 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난 B가 아무런 의도 없이, 그저 재미를 위해 그런 말을 한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필시 A를 망신주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자기 전에 누워서 B가 한 말을 떠올렸다.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어쩌면 전부 다 비정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B가 말한 대로 절반이 이상하고 나머지 절반만 괜찮다면, 정말로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에 속하는 B도 내가 볼 때 제정신이 아니었다. 공공연히 다른 사람을 헐뜯는 자신도 비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내 결론에 문제가 있다면 B가 했던 말에도 문제가 있다. B는 명문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심취해 그가 얼마나 오만한 말을 했는지...... 아무래도 모를 것 같다. 지금도 그의 주변에는 항상 그를 신봉하는 자들로 넘쳐날 테니까.


2.

지도 교수님도 ○○ 대학교 출신이다. 난 교수님과 친했지만, 다른 학생들은 그러지 못했다. 교수님은 참...... 직설적인 분이었다. 학생들은 교수님의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직설적인 어법에 상처를 받았을 거다. 교수님이 다른 학생들에게 어떤 말로 상처를 줬는지 그 사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으나, 내가 겪었던 일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그 말들이 학생들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으리라.


학생 때 교수님께 에세이를 쓰고 있다고 말하자 교수님은 해맑게 웃으면서, "네가 에세이를 써도 읽을 사람이 없을 거다." 하셨다. 나도 지어낸 이야기이길 바란다.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교수님께서 글쓰기 과제를 내주셨다. 나는 여러 번 퇴고해서 글에 있어서만큼은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여지없이 그 기대를 박살 냈다. 당시에 쓴 글의 주제는 '영어 공부 방법'이었다. 내 글의 서론은 이렇게 시작됐다.


"저의 영어 공부 방법은 베스트셀러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말도 아직 안 끝났는데 교수님은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아니다." 하셨다. 자기가 들어보지 못한 책은 베스트셀러가 아니니 입에도 올리지 말라고 하셨다. 이쯤 되면 보통 성격이 아니었다는 걸 쉬이 짐작할 수 있을 거다. 교수님은 그런 분이었다. 듣는 사람들의 기분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궁금할 것으로 예상되는 질문은, 왜 나는 그런 말에 상처를 입지 않았냐는 점일 것이다. 나에겐 별 타격이 없는 말들이었다. 왜냐면 나는 '의견'이 아닌 '사실'에 대해서는 화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에세이를 쓴다고 했을 땐 '브런치'가 없었고, 또 이렇게나 많은 분들이 내 계정을 구독해 주실 거라 생각지도 못했다. 내 글은 그 상태가 나아지고 있으나 딱히 잘 쓴다고 할 정도는 아니니, "네가 에세이를 써도 읽을 사람이 없을 거다"라는 말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도 진실인 말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는 1999년 베스트셀러가 확실하나 교수님은 분야가 다른 전공이었으므로 그냥 들어본 적이 없겠거니 하고 넘겼다. 가히 그 지도 교수에, 그 학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최근에 있었던 일로 인해 더 이상 교수님과의 교류를 이어갈 수 없게 됐다. 오랜만에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의료기관에 취업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줄 수 있냐는 거였다. 학생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은 직장인이 취업 강의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망설이다가 이제 정년까지 1년 남았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자주 연락을 드리지 못한 점과 그동안 교수님이 느꼈을 섭섭함까지 겹치니 도저히 거절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취업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일단 의료기관의 채용 인원 자체가 많이 줄었다. 현실이 이러한데 학생들에게 과연 희망적인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까. 게다가 나는 인사과도 아니어서 병원 채용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의료기관 취업을 희망하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그것 좀 알아봐 주면 어떠냐 싶겠지만 현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발언은 매우 위험하고 또 무책임하다. 그러니 내가 전달할 수 있는 건 어떻게 취업 준비를 했느냐 뿐인데...... 솔직히 이것에 대해서도 딱히 할 말이 없다. 물론 준비를 열심히 했었지만, 운이 많이 작용했었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고 학생들 앞에서 '운이 좋아야 합니다'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교수님께 전화를 걸어 의견을 여쭙기로 했다.


전화를 받은 교수님의 목소리가 밝지 않았다. 교수님의 심리 상태가 불편한 쪽에 가까운 것 같아 절로 주눅 들었다.

"학생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난 이미 자네에게 과제를 줬고, 그 과제에 대해서 할 이야기는 자네가 생각해야지."

"?"

교수님 말씀이 맞다. 이건 내가 할 일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과제를 하고 있는 건가?

"자네는 어떤 이야기를 할 계획이었는데?"

"일단 취업 현황에 대해 말하고, "

"이러면 안 돼. 자네는 지금 내 질문에 몇 글자 대답하지 않았어."

"네?"


교수님의 말을 듣는 순간, '아, 내가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를 깨달았다. 시간도 많이 흘렀겠다, 나는 교수님과 어느 정도 수평적인 관계라고 생각했었다. 더 이상 예전처럼 교수와 제자가 아닌, 사회인 대 사회인으로서 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었다. 착각이었다. 교수님은 여전히 나를 흔한 학생들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분명했다.


다음 주에 할 강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니 현직자가 학생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수님은 자기에게 그런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투였다. 또 교수님은 이런 질문을 하는 내가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듯이 말했는데, 왜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매우 불쾌해졌다. 불쾌했던 이유는 교수님이 '사실'이 아닌 '의견'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학생 신분이었다면 교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여겼겠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교수님이 지도해야 할 학생이 아닌 한 명의 사회인이다. 그런 나를 교수님이 기억하는 과거 이미지에 가둔 채 말한다면 그건 매우 무례한 일이다. 교수건 나발이건,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그런데 앞으로 정년이 1년 남은 교수님은 할 말, 못 할 말 구분하지 못하니 그 인격이 바닥이라 할 수 있겠다.


대학교에 다닐 때 자주 들었던 교수님의 고민은, 학생들에게 조언을 해도 학생들이 그 조언을 알아듣질 못한다는 거였다. 과연 교수님다운 고민이었다. 학생들이 교수님과 친해지려 하지도 않고, 교수님의 말을 귀담아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교수님의 거친 표현 때문이었다. 교수님께 교수님의 표현이 문제라고 말한다면 교수님은 반드시 "학생들이 교수에게 맞춰야지"라고 말씀하실 게 뻔하다. 글쎄. 교수님이 정년 퇴임하는 날, 소중한 마음을 담은 꽃 한 다발 가져다줄 제자가 있을까.


없다.


이제 교수님이 모르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아니라는 말도 그냥 참고 넘길 수 없게 됐다. 얼마 안 남은 교직 생활 동안 교수님은 자기 말을 알아듣는 학생이 한 명도 없다며 무식한 학생들 탓만 할 것이다.


○○ 대학교가 문제인가 싶은 어리석은 생각까지 해본다. 훈련소에서 만난 B나 지도 교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엔 내 위에 사람 없다고 여기는 듯한 느낌이 아주 강했다. 너무 똑똑한 것도 문제다. 그들은 공부에 적합한 머리를 가졌지만 사람에는 적합하지 않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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