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필휘지와 리터칭에 대한 생각
한숨에 글자를 쓰는 행위를 뜻하는 말로 흔히 서예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끊김 없이 쓰고자 하는 글씨를 거침없이, 더불어 아름답게 쓰는 모습을 보면 감탄사처럼 나오게 되는 용어다. 혹은 누군가의 경지를 나타내고자 할 때 쓰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글자 혹은 글씨를 쓴다고 한다. 당연히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쓰다'의 첫 번째 뜻은 글자의 모양을 나타낸다는 의미다. 그러나 가끔 글자를 쓰는 행위가 정성스럽고 정교할 때, 우리는 이를 그린다고 달리 표현하기도 한다.
"이야, 이건 거의 그린 건데?"
나름의 정성스러움을 표현한 말이다. 우리는 글자를 한 번에 한 획씩 써서 나타내지만, 그림은 수많은 선과 칠로 이루어져 하나의 매개체가 드러난다. 눈으로 보기에도 '동전'이라는 글씨보다는 실제 동전 크기의 그림을 그린 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더 많은 펜놀림이 들어간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간과된 점이 있다. 만약 그 동전이라는 글씨가 필기가 아니라 정성스레 쓰인 서예라면, 'ㄷ'의 작은 획을 쓰는 것에도 같은 정성과 그동안의 연습이 녹아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의 글씨를 그림 같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한껏 꾸민 레터링이나 큰 작품, 혹은 쓰는 모습을 보고 그림과 같이 정성 들이는 모습에 우리는 그렸다고 표현을 한다. 그렇다면, 글씨와 그림의 차이는 획을 몇 번 더 그었다는 것일까? 이 생각을 하게 만든 질문이 얼마 전 단톡방에서 튀어나왔다.
"영문 캘리를 최근 관심 있게 보고 있는데, 리터칭의 경우 글씨의 영역인가요, 그림의 영역인가요?"
여기서 나온 리터칭은 일필휘지와는 반대되는 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글씨로 치자면 획 위에 덧대어 써서 모양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는 쓰는 형태에 적용하는 차이가 있다. 두 분야로 나누자면 동양의 서예와 서양의 캘리그라피로 분류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캘리그라피를 번역하면 서예고, 서예가 곧 캘리그라피인지라 동서양을 구분하는 것이 맞겠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쓰는 도구와 이를 받아들이는 문화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금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미지를 생각하며 비교하자면, 우리 서예(書藝)는 글자를 씀으로써 교양과 인성을 배우고 익히는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일필휘지란 용어도 학문을 갈고닦아서 일정한 경지에 오르기 위한 바람에서 나타난 말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에 반해 필자가 주로 쓰는 고딕 서체의 경우, 글자를 통해 학문을 깨우치는 것이 아닌 정보의 전달과 배포를 위해 탄생한 글자이다. 서양의 캘리그라피는 예술과 기술로서의 의미가 크다. 얼마나 얇고 정확하게 돌에 새길 수 있는지 기술 가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카퍼 플레이트, 일정한 종이면적에 최대한 빽빽이 쓰려고 만들어진 블랙 레터 등 다양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예술로 발전하여 아름다운 형태가 가미되었다.
이 구분에 따라 리터칭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다르다. 캘리그라피를 먼저 살펴보자면, 씀에 있어서 일정한 모양을 내는 것이 중요한 요소이다. 종이의 종류, 도구의 상태 등에 따라 같은 획이라도 똑같지 않게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필요한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표현되지 않은 부분은 리터칭이 필요한 것이다. 일부 고전 서체는 리터칭과 마찬가지라고 생각될 수 있는 획이 교재에 실려있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리터칭에 관대하다는 점이 주목할 요소이다. 정확하고 일정한 모양새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을 나타내는 리터칭은 오히려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이 또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최대한 한 번에 써내는 것이 테크닉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반대로 서예는 획의 끝을 처리하는 회봉이나, 이음을 위해 일부분을 덮어쓴다. 다만, 지나간 자리에 부족한 부분을 채우진 않는다. 비교적 리터칭으로 부족해질 수 있는 부분을 채우는 캘리그라피와 달리 동양의 서예는 리터칭을 하는 대신 새로 쓴다. 무엇보다 먹물을 덧대면 종이가 버티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이상해진다.(시안 1로 다시 돌아가는 디자인계의 마법과 같은 것일까, 손대면 더욱 이상해지는) 그뿐만 아니라 글씨를 쓰는 행위만으로도 학문으로 바라봤던 동양의 문화에 따라 리터칭은 거의 금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리터칭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르지만, 앞서 말한 질문에 대한 필자의 답은 한 가지다. 리터칭도 글씨의 영역이다. 형태보단 목적에 중심이 잡힌 답변인데, 리터칭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결론이다. 무엇이든 형태와 방식은 같아도 무엇을 표현하는지에 따라 결과물이 표현된다. 도구를 예로 들자면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 아크릴화고,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 유화겠지만, 극단적인 예로 어떤 물감이든 그걸로 글씨를 쓰면 글씨인 것이지 그림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리터칭과 같이 추가적인 획과 다듬는 방식을 통해 글자의 모양새를 드러낸다면, 그것은 글씨인 것이다.
어느 새부터 취미로 각광을 받으면서 캘리그라피에 대한 교육과 전승이 국내에 많이 이뤄지고 있는 만큼, 획을 쓰는 기술에 대한 수준도 많이 높아지고 있다. 매니퓰레이션과 같은 기교부터 플러리싱 장식도 많은 국내 작가들을 통해 그 기술이 전해지고 있다. 기술과 예술은 한 끗 차이다. 기술을 갈고닦고, 도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창작을 펼쳐내야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캘리그라피는 예술에 한 발 담그고 있는 기술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같은 획이라도 쓰는 과정 속에서 이뤄지는 기술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리터칭 없이도 쓸 수 있는 기술의 차이가 획의 완성도로 이어지고, 이는 나아가 창작할 수 있는 범위의 크기를 늘려주게 된다. 이에따라 리처팅은 필요에 따라 글씨의 구성요소로 포함된다. 즉, 형태와 방식이 아닌 쓰임의 목적에 따라 글씨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동서양의 일부 시선 차이는 있을 수 있다. 비교적 서예의 경우 리터칭을 금기시하고 캘리그라피의 경우 어느 정도 인정을 해주지만, 그렇다고 캘리그라피에서 일필휘지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서체에 따라 리터칭이 필요할 뿐, 가능하다면 일필휘지가 당연히 좋다.
획을 몇 번 덧대거나 그었다고 그림인 것이 아니다. 리터칭은 분야와 서체에 따라 필요한 부분이고, 그림 같다고 하는 것은 시선의 차이에 따른 칭찬일 뿐이다. 집밥을 먹고 밖에서 파는 것 같다고 칭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재치 있는 말이다. 다만 이 부분은 구분해놓고 웃는 게 좋겠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글자는 쓰는 것이라는 게 당연한 것이지만, 이것이 문자도나 아트워크의 개념으로 번진다면 어떨까. 이는 또 다른 문제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 속에서, 필자는 캘리그라피라는 분야를 조금 구분 지어 보았다. 부디, 여러분은 그림 같다는 칭찬을 받으면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고 넘어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