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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 Dec 19. 2018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그 허리 아래 어딘가쯤

정규직, 될 수 있을까?

나이 26세, 고시 공부 3년, 인서울 4년제 졸업 후 취업 준비만 또다시 1년 하고도 반년. 현재까지 사회에서 내가 받은 성적표다. 1년 반 중 한 달 남짓은 외국계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했고, 6개월 전부터는 지금의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당연히 회사에서 나의 위치는 ‘을 of 을’. 커피 한 잔을 타다가도 회사 분과 마주치면 눈치가 보인다. 혹시 일은 안 하고 내내 커피만 마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에.


업무 중 대부분의 시간에서 나의 갑은 바로 위 직속 상사다. 다행히 소위 말하는 ‘갑질’하는 갑은 아닌지라 그를 대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다. 그럼에도 완료한 업무를 그에게 보고하는 참에는 늘 그렇게 긴장이 된다. 점잖은 성미의 그가 내심 말은 못 해도 나를 잘못 뽑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지, 한 동안 마음을 졸인다. 10대 때의 나는 지방 대도시에서 ‘난다, 긴다’하며 ‘영재’ 소리를 들었는데, 그때의 영광이 참 부질없다.


‘나의 갑’의 갑과 ‘나의 갑의 갑’의 갑


당연한 말이지만 ‘나의 갑’에게도 갑이 있다. ‘바쁘니?’하는 물음으로 조심스럽게 업무를 지시하는 그 역시 ‘정규직 리그’ 내에서는 또다시 막내이기 때문이다. ‘나의 갑의 갑’을 만나면 나는 을에서 병이 된다. 애석하게도 ‘나의 갑의 갑’에게도 갑이 있다. 이제 나는 한 계단 더 내려가 정이 된다. 이렇게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의 계단 위에 내가 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가운데를 뚝 끊어 그곳을 허리라고 한다면, 허리 아래 그 어딘가에 내가 있다. 언젠가 정규직이 되어 딱 허리, 그즈음에만 이라도 설 수 있기를 바라며 고군분투하는 내가 서 있다. 


같은 비정규직 처지끼리 모여 점심을 먹는다. 우리나라 기자들 죄다 기억상실증, 뭐 그런 거 아니냐며 실없는 농담을 나누고는 깔깔대고 웃는다. 지난달에도, 그 지난달에도, 새해가 시작되던 연초에도, 그리고 한 해가 가던 연말에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헤드라인을 오늘 아침 인터넷 신문에서 또 보았다고. 같은 내용의 기사를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다가 숫자만 조금 바꿔 재발행해도 되겠다며, 자조적인 농담을 나눈다. 익숙한 그 헤드라인은 바로, ‘역대 최악의 청년 실업률, ОО%에 육박.’ 15년 전, 청춘 시트콤 ‘논스톱 4’에서 극 중 고시생으로 등장한 앤디의 대사가 귀에서 맴돈다. 


"조용히 좀 하세요, 조용히 좀!
아시다시피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인해 청년실업이 40만에 육박하는 이때......."


바닥에 배 깔고 누워 귤이나 까먹으며 ‘논스톱 4’를 애청했던 11살의 나는 까맣게 몰랐다. 경기침체는 그 이후로도 15년 이상 계속적으로 장기화될 것이며, 어린 내가 가늠할 수 조차 없던 40만이라는 숫자 중 하나가 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 계속되는 고용 창출 압박 속에 한 공공기관에서는 단 이틀짜리 체험형 인턴 모집 공고를 냈다는 기사를 읽었다. 단 이틀을 일하기 위해 곱절은 족히 넘는 시간 동안 청년들은 자소서를 쓰고, NCS 시험을 보고, 면접장에 간다. 청년 고용 절벽이 만들어낸 촌극이다. 중학생 시절 읽었던 동화책 한 권이 생각난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던 그 책에는 나비가 되고 싶은 애벌레들의 경쟁이 묘사된다. 서로 밟고 밟히며 하늘로 향하는 애벌레들의 맹목적인 경쟁. 그중 단 한 마리, 1등 애벌레가 2등 애벌레의 머리를 마침내 짓밟고 선 곳에 무엇이 있었을까? 


정답은, 허공.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비가 되고 싶은 애벌레들의 맹목적 경쟁,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허리라도 되고 싶은 꼬리들의 경쟁.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쓰는 오늘


그럼에도, 이 경쟁의 끝에 결국 남는 것은 허무일 뿐이라고 일찍이 회의하고 싶지는 않다. 나비가 되기 위해 정점을 향해 오르던 애벌레들의 분투처럼 우리 청년들의 노력, 그 끝에 아무것도 없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짓밟으며 애타 하지 않아도 시간이 가면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고, 결국에는 나비가 되듯 우리도 저마다 각자의 시기를 만날 것이라고 믿는다. 근거 없는 믿음일 지라도, 그 믿음은 적어도 내 하루를 지탱한다. 


“좋은 아침!”

웬일로 밝은 상사의 인사에 나도 방긋, 웃으며 “안녕하십니까” 인사한다. 비록 어젯밤에는 정규직 공채 ‘최종탈’의 아픔에 베갯잇을 한참 적시다 선잠을 잤더라도, 그 흔적으로 퉁퉁 부은 두 눈은 반짝이는 글리터 아이섀도우로 감쪽 같이 숨긴다. 그래, 오늘 또다시 시작할 하루 일과가 있잖아. 하루 일과라고는 없던 ‘완전 백수’ 시절을 떠올리며 스스로의 작은 위로와 함께 자리에 앉는다. 내 자리 파티션에 회사 근처 한 카페에서 받은 커피 슬리브를 잘 오려 붙여 두었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허리를 꿈꾸며, 커피 슬리브에 손글씨로 적힌 두 문장을 매일 아침 닳도록 읽는다. 


‘나는 느리게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뒤로 가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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