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판대 위의 대중문화
- 이슈와 볼륨
30년대 중후반 미국 대도시, 우리가 가판대에서 얇은 만화책을 집어들고 가격을 지불했다 가정하자. 수퍼맨이 처음 데뷔한 만화책의 가격은 10센트다. 당시 물가를 따져보지 않아도 매우 싼 가격이다. 그 한 권의 만화책을 가리키는 단어는 이슈 issue 라고 한다. 한 편이 실려있는 얇은 책이건, 여러 편이 실려있는 두꺼운 책이건, 똑같이 이슈라 불렸다. 이슈의 경우엔 10센트의 가격으로 통일하는 것이 시장의 분위기였다. 심지어는 34년 7월에 발매된 Famous Funnies의 1회, 즉 #1은 68페이지나 되었고 이후의 이슈도 대부분 60페이지 이상이었지만 역시나 가격은 10센트였다. 시장의 지배적인 분위기였고, 이런 분위기는 21세기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왔다. 특별히 양이 많아서 두꺼운 이슈가 아닌 한은 대부분 시가를 따른다. 2020년 초 현재에는 약 30페이지 정도의 월간 이슈가 3.99 달러 정도 한다.
반면 싼 가격만큼이나 인쇄 상태와 제본 상태는 좋지 않다. 타블로이드 사이즈, 즉 374mm × 254mm 크기의 B4 용지를 반으로 접고, 접힌 가운데 부분을 스테이플러로 제철한 것이 제본의 전부였다. 그래서 이슈의 페이지 수는 언제나 짝수였다. 현대에는 브로셔나 카탈로그에 주로 쓰이는 중철제본이라 불리는 방식인데, 제본 단가가 저렴하고 펼치기에 좋다. 후일 2차 대전으로 인해 미국 내의 철 유통량이 줄어들자, 끈으로 제철한 경우도 등장했다.
Famous Funnies 의 경우엔 월간으로 출간되었는데, 다른 만화 중에는 주간으로 출간되는 이슈도 있었다. 즉, 이슈라는 단어는 페이지 수와는 관계없이 정기간행물의 매 호차를 의미하는 단어다. 그래서 잡지 등의 다른 정기간행물의 경우에도 이슈로 지칭하며, 각 이슈를 개별적으로 표기할 때는 순차적 의미의 number를 뜻하는 #뒤에 숫자를 붙여서 지칭한다.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호수로 표기하여 ‘통권 몇 호’라는 식으로 지칭하지만, 한국에선 비주류 장르에 속하는 미국 만화의 경우엔 이슈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다. 그리하여 우리는 “수퍼맨이 첫 데뷔를 한 액션 코믹스 #1 이슈를 가판대에서 10센트를 주고 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의 연재 후 단행본 출간 방식과 마찬가지로, 이슈가 모이면 페이퍼북 혹은 페이퍼백 형태의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이 단행본의 경우엔 볼륨 volume 이라고 부른다. 이슈는 회차의 단위이니 볼륨은 단행본의 단위다. 페이퍼백이라는 제본 방식은 소프트커버라고도 부르며, 반양장제본이나 문고본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적절한 번역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데, 표지를 특별하게 인쇄하거나 코팅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표지용 종이를 따로 쓰거나 코팅을 하는 한국의 경우엔 페이퍼백으로 부르기가 애매하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시기의 딱지본 소설이 가장 비슷한 예다. 페이퍼백 방식 역시 양장제본이나 반양장제본보다 제본 단가가 싸기 때문에 보급형 서적에 쓰인다. 볼륨 또한 이슈처럼 싸게 많이 파는 것이 목적이라는 특징이 드러난다.
초기의 만화 이슈, 즉 한 회차는 여러 편의 만화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짧은 단편 여러 개가 한 이슈에 실려 있었다. 차츰 인기가 많은 시리즈의 비중이 커지는 쪽으로 바뀌어갔고, 수퍼히어로 장르가 만화 시장의 반독점 장르가 되어갈 40년대부터는 아예 이슈 하나에 한 편이 연재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 가판대 위 대중문화, 코믹스
수퍼맨으로 수퍼히어로 장르의 빅뱅이 터지기 이전, 미국 만화가 가판대 위에 이슈를 올려놓기까지의 간단한 배경을 알아둘 필요는 있다. 거리의 가판대는 숫자도 많을 뿐더러 소비자 노출도가 높은 판매처였고, 그래서 여기에 입점하기 위한 조건은 빡빡했다. 미국 만화는 어떻게 가판대 유통을 할 수 있었는가. 그걸 가능하게 한 유통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수퍼맨의 빅뱅은 없었다. 시작은 신문 지면을 타던 유머 만화들의 히트였다.
앞서 언급한 Famous Funnies 는 수퍼히어로가 아닌 유머 만화로, 미국 만화의 전환점 내지는 미국 만화 출판의 시작점으로 평가된다. 1933년에 처음 판매를 시작한 이 시리즈는 1929년에 창간된 델 Dell 출판사의 ‘The Funnies’ 라는 잡지에서 16페이지로 시작했다. The Funnies 에서 연재된 만화 중 인기가 많았던 것들을 모았으니 제목이 Famous Funnies 가 된 것이다. 이후 1933년에는 이스턴 컬러 Eastern Color 라는 출판사로 옮겨 Funnies on Parade 라는 8페이지 이슈를 발매했고, 곧이어 델과 이스턴 컬러의 합작으로 Famous Funnies: A Carnival of Comics 라는 제목의 36페이지짜리 분량으로도 발매됐다. 이 책이 미국 최초의 출판만화였다.
이후 이 시리즈는 다시 합작으로 Famous Funnies: Series 1 이라는 68페이지의 볼륨을 발매하기도 했다가, 이스턴 컬러로 완전히 옮겨 34년 7월에 #1을 발매했다. 이 이슈는 볼륨 1과 동일한 68페이지였으며 이전에 출판됐던 세 권의 이슈에 있는 만화도 실려 있었다. 분량과 구성으로 보면 볼륨이지만 정기간행물의 일부이기에 이슈로 정의한다. 이슈 #1은 20만 부 정도가 인쇄되어 90% 가량이 팔린 것으로 집계된다. 이스턴 컬러는 처음에는 4천 달러 정도의 적자로 시작했지만 #12를 출판할 때쯤엔 3만 달러의 흑자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후대에 의해 “진정한 아메리칸 코믹스의 시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출판 만화의 시작으로서도 그렇지만, 여기서 확립된 출판 및 유통의 시스템이 이후 미국 만화의 표준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대공황의 틈바구니에서 미국 만화가 영향력과 경제 가치를 증명한 첫 메가히트 사례다.
만화라는 매체는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하게 시작했다. 처음엔 신문의 곁다리 코너로 시작했고 출판계에서는 싸게 사서 쉽게 읽어치우는 가벼운 매체로 출발했다. 그런 면에서 미국 만화의 중철제본 방식은 크게 신기한 것은 아니다. 90년대 한국의 만화잡지들 중에서도 판매량이 상대적으로 적을 15세 이상 혹은 19세 이상의 잡지들은, 분량이 상당했음에도 중철제본을 했다. 영챔프, 영점프 등의 ‘영’ 시리즈들을 기억하는 성인들이 있을 것이다. 중철제본된 이슈와 페이퍼백 형태의 볼륨은 만화라는 장르가 가성비 좋은 저렴한 매체로 시작했음을 증명한다. 싸야 했던 이유는 소비자들의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델에서 The Funnies 를 창간한 1929년은 '검은 목요일'의 해다.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으로 인해 내수 경제가 침체해버리면서 기약을 알 수 없는 불황이 시작되었다. 대공황의 원인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직전까지의 미국 경제는 호황이었다. 1차대전에 멀찍이 있었던 미국은 유럽으로의 수출을 통해 큰 경제성장을 이뤘으나, 성장에 너무 취했는지 과잉 생산을 막지 못했다. 한국이 IMF를 맞게 되던 때와 같은 플롯이었다. 빚까지 내는 무리한 성장, 신용화폐는 급증하는데 실질화폐는 그 증가세를 따라가지 못하는 불균형, 낙관에 근거한 주식 투기. 미국과 유럽에서 과잉 생산된 부가 주식 시장으로 몰려들어 주가는 상승했지만, 정작 배당금이나 주식 판매금의 형태로 시장을 떠받쳐줘야 할 실물 화폐가 부족했다. 20년대 미국의 호황은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터뜨린 샴페인이었으며 살얼음판 위에서의 스케이트 시합이었다.
정확히 원인과 시기를 특정하기 어려운 어느 순간, 얼음에 하나둘 금이 갔다. 금이 겹치면서 얼음판이 깨진 날이 검은 목요일이다. 다우 지수는 급하락했고 거래량은 급증했는데 대부분이 매도량이었다. 자기 부의 일부 혹은 상당수를 주식으로 구성해놨던 미국 중산층은 한순간에 재산을 잃었다. 검은 목요일 하루의 오전에만 11명이 투기 실패로 인해 자살했다. 기업은 돌릴 수 있는 자본이 모자라니 급여를 동결하고 채용을 줄였다. 국가는 실물 화폐를 찍어내자니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우려되어 선뜻 손을 댈 수 없었다. 대량생산 공업국 미국이 망해가고 있었다.
20년대 후반과 30년대는 대중문화라는 개념이 발견되고, 대중문화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영화가 발명되었고, 라디오가 보급되었다. 오랜 호황으로 인해 국민들은 신매체를 여럿 경험해봤고, 보급된 매체 기기의 숫자도 많았다. 라디오와 가판대 읽을거리는 대공황 시대를 사는 시민들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엔터테인먼트였다. 또한 이 만화들이 다루고 있는 소재도 현실과의 관계가 가까웠다. 유머, SF, 판타지 장르는 대공황의 암울한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게 해주는 도피처가 되었다.
또한 당시 미국은 이민자는 증가하는데 공권력 시스템은 상대적으로 낙후하여 범죄율이 늘어가고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으로 넘어왔지만 대공황으로 인해 일자리는 없고 국가와 지역의 정치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여 이민자들은 자신들끼리 모여 갱을 만들게 된다. 이민의 물결에서 막차를 탔던 아일랜드계와 이탈리아계는 선행 이민자 그룹에 의한 계급적 차별에 직면했다. 기존의 정치 및 경제의 주류로 편입되기 힘들자 이들은 자신들의 단체, 갱단을 만들었다. 갱단은 범죄 조직인 동시에 지역 이민자들의 지역 정치를 담당하는 조직으로도 기능했다. 유대계, 중국계 등도 이런 수순을 밟으면서 치안과 범죄는 중요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런 현실을 배경으로 성장한 장르가 탐정, 범죄, 추리 장르였다. 문학의 치유 기능과 사회 반영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 펄프 픽션의 후계자, 코믹스
Famous Funnies 의 독립과 히트는 만화의 판로 개척에도 의미가 있다. 이전의 만화들이 대중을 만날 수 있는 매체는 신문 지면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때부터는 독립 장르가 되어 가판대에 꽂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가판대에는 선배 장르가 있었다. 시장에서의 위치도, 시장에서의 기능도 엇비슷했던 선배는 대중 소설, 일명 펄프 픽션 pulp finction 이었다. 펄프 픽션과의 경쟁을 위해서도 10센트의 가격은 적당했다. 만화가 부상하기 이전의 저렴한 읽을거리는 추리, 범죄, 공포 등을 다룬 가판대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들의 가격도 대부분 권당 10센트로, 흔히 다임 노벨 Dime Novel 이라고도 불렸다. 아마 우리가 둘러봤던 가판대에는 펄프 픽션과 만화 이슈가 섞여서 꽂혀있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가판대의 펄프 픽션들이 다루던 소재와 장르가 만화로 옮겨온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설과 만화의 관계는 당시의 미국 시장에서만이 아니라, 장르적으로도 상당히 가깝다.
만화는 그림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기에 회화의 자손 같지만, 그림 텍스트만큼이나 글 텍스트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만화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 중 하나는 소설의 삽화에서 출발했다는 이론이 있다. 그 이론에 걸맞게, 미국 만화는 소설에서 받아온 유전자를 상당히 보존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미국 만화의 글 텍스트는 그 양이 다른 나라의 만화에 비해 월등히 많다. 당대의 펄프 픽션에서 주도적인 경향이었던 하드보일드 문체의 영향인지, 만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캐릭터는 장면마다 독백을 한다. 이 독백 캡션은 해당 컷의 상황을 설명하거나 그 상황에 대해 캐릭터가 느끼는 심상을 서술한다. 모든 서술이 캐릭터의 독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동시에 캐릭터 간의 대화 양도 매우 많다. 달리 보면 극을 전개시키는 기능을 그림 텍스트보다 글 텍스트가 더 많이 담당하고 있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충격파와 동작선의 활용, 바람이나 입김의 표현, 운동감이 있는 포즈 등을 활용하는 만화적 표현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컷에 들어간 그림들이 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더 정확히는, 만화 특유의 역동적인 표현 기법들이 충분히 개발된 현재에도 삽화를 떠올리게 하는 정적인 연출이 관찰된다. 소설 삽화의 유전자가 남긴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암울하면 대중은 영웅을 갈구한다. 이 상황을 개선시켜 줄, 최소한 강력한 대리만족을 맛보여줄 초월적인 누군가. 영웅은 문학이 오랫동안 연구하고 발전시킨 테마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험물이나 판타지에서는 지치지 않고 용기가 마르지 않는 탐험가가 등장하고, 탐정물에서는 노련하고 현명하고 냉정한 탐정이 등장한다. 펄프 픽션에서도 만화에서도 이런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영웅적 주인공이 등장하는 탐정물, 범죄물, 공포물, SF, 판타지 장르가 만화로 옮겨갔다고 할 수 있다.
33년에 처음 출간된 닥 새비지 Doc Savage 는 본명이 클라크 새비지로 인디아나 존스 유형의 주인공인데, 신체와 정신의 내구도가 뛰어난 점을 따서 별명이 청동 사나이 The Man of Bronze 이다. 수퍼맨의 별명인 강철의 사나이 The Man of Steel 와 본명인 클라크 켄트가 떠오른다. 1930년의 섀도 The Shadow 는 검은 모자와 망토를 쓴 자경단으로, 배트맨에 영향을 주었다. 1933년 스파이더 The Spider 또한 범죄자를 살해한 뒤 거미 상징을 놓아두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스파이더맨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있다. 따라서 수퍼히어로 만화의 시작은 펄프 픽션에서 다루었던 모험물의 영웅, 탐정물의 탐정, 판타지물의 마법사 등을 만화로 옮겨보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고 정의할 수도 있다. 독자들 또한, 텍스트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비슷한 연장선상의 이야기로 인식하고 가판대에서 집어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화를 소설의 후예라고 보더라도, 만화의 정체성은 글 텍스트와 그림 텍스트의 결합에 있다. 그리고 만화는 그림을 칸으로 자른 후 연결시키는, 칸 안에 그림과 문장을 넣고 이를 병기하는 방식의 장르다. 줄이면 분절성과 연결성이다. 시점이나 시간에 의해 조각난 칸을 어떤 식으로 연결시키는가에 만화의 특징과 개성이 있다.
우리가 집어든 만화는 당시 미국에서 코믹스 comics 내지는 단수형인 코믹 comic 이라고 불렸다. 그 이전의 용어는 카툰 cartoon 과 코믹 스트립 comic strip 이었다. 조각난 칸이 이어지는 형식이어서 strip(조각)이라는 단어가 쓰였고, 펄프 픽션의 시장 기능을 이어받기 이전의 만화는 주로 유머를 다루었으니 comic이 앞에 붙어서 코믹 스트립이 되었다. 이 단어가 다시 줄어들어 코믹스, 좀 더 줄이면 코믹이 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코믹스는 기존 장르 명칭인 카툰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카툰은 4컷 이하의 만평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축소되었다. 앞서 언급한 Famous Funnies: A Carnival of Comics 의 제목에서 1933년 당시 이미 코믹스라는 단어가 대중적으로 쓰이는 장르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파생된 comix 라는 용어도 있는데, 이는 50년대에 등장한 언더그라운드 만화를 지칭하는 용어다. 70년대가 되면 만화 혹은 만화의 일부를 지칭하는 그래픽노블 Graphic Novel 이라는 새 용어가 등장하지만, 둘 모두 대공황 시대에서는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이니 당장의 수퍼맨과는 관계가 없다.
분리되었지만 연속된 칸이 이어지는 특징에서 유래한 용어가 코믹 스트립이다.
현재는 코믹스나 카툰에 비해 연속성 개념과 유머성을 강조할 때 주로 쓰이는 용어다.
예시는 짐 데이비스 Jim Davis 의 코믹 스트립, 가필드 Garfield 의 2013년 4월 9일 연재분으로, 번역은 직접 했다.
한국어로는 코믹 스트립, 코믹스 등의 단어를 통합해 미국 만화로서 지칭할 수 있다. 다만 장르적 특징을 강조해야 할 때는 해당 용어를 음역해서 쓸 것이다. 장르의 기술 특성을 언급할 때는 코믹 스트립, 역사와 시장의 특성을 강조할 때는 코믹스라고 말이다.
- 회사, 조합, 분업, 저작권
앞서 설명했듯 코믹스가 백화점 체인으로, 다시 가판대로 독자적 판매 루트를 만들기 이전에는 신문 연재가 거의 유일한 유통 매체였다. 따라서 코믹스 작가들은 신문사에 종속된 관계였다. 하지만 코믹스가 폭발적으로 대중문화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자, 델 출판사를 필두로 하여 몇몇 출판사들이 코믹스를 다루거나 코믹스 출판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량생산과 이익집단 조직의 전통이 강한 미국답게, 다음 수순은 출판사들이 뭉친 조합이었다. 이 조합은 지금도 코믹 스트립 신디케이트 comic strip syndicate 로 불린다. 조합의 전통이 코믹스라는 장르명이 정착되기 이전에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여러 단체가 뭉쳤으니 넓은 유통 구조에 접근할 수 있었고, 차츰 조합과 조합 소속 출판사들이 신문과 잡지와 가판대 유통회사에 코믹스를 배급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후엔 작가 조합도 생겼다. 1935년 기준으로는 미국 내에 존재하는 조합이 130여 개였다. 이들의 배급망은 전 세계 1만4천여 개 일간신문 혹은 주말판 만화 지면에 미쳤고, 배급하는 만화는 1600여 종이 넘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가판대에서 코믹스 이슈를 집어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체가 회사와 조합이었기에 코믹스 작가는 주로 회사에 소속되는 형태로 활동했다. 현대 한국에서 연예인이 기획사에 소속되거나 하는 형태와 유사하다. 그리고 수퍼히어로 장르를 선도하고 지배하는 두 회사 모두, 조합들이 유통망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30년대에 창사했다. 1934년 7월 25일 개업한 내셔널 얼라이드 퍼블리케이션즈 National Allied Publications 는 인수합병과 사명 변경을 거쳐 후일 DC 코믹스 DC Comics 가 된다. 1939년 1월 12일에 개업한 타임리 코믹스 Timely Comics 는 몇 번의 사명 변경을 거쳐 후일 마블 코믹스 Marvel Comics 가 된다. 이들은 후일 단독으로 조합의 규모를 뛰어넘는 거대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회사가 작업을 주도하고 작가가 고용되는 형태다 보니 분업화 시스템이 일찍부터 정착되었다. 어쩌면 대량생산의 나라인 미국답게 공장식 시스템을 추구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코믹스는, 특히 수퍼히어로 코믹스의 경우에는 절대 다수의 대부분이 다음과 같은 분업의 형태로 모든 이슈를 만들어낸다.
스토리 작가 writer 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스토리는 소설이나 대본의 형태인데, 가끔 콘티의 형태를 하기도 한다. 작가진의 이름을 병기할 때 가장 앞에 나온다. 그래서 팬레터를 가장 많이 받는다. 이야기와 설정의 주도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펜슬러 penciller 가 스토리에 따라 연필 밑그림을 그린다. 콘티 담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작가진의 이름을 병기할 때 두 번째로 나온다. 그림의 기본 크레딧을 가져가는 사람이니만큼 팬레터도 두 번째로 많이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잉커 inker 가 연필화 위에 펜그림을 입힌다. 펜슬러와 대부분 겹치지만, 다른 작가가 맡았다면 작가진의 이름을 병기할 때 펜슬러 다음인 세 번째로 나온다.
채색가 colorist 가 완성된 펜화 위에 채색을 입힌다. 채식가(彩飾家)로도 번역된다. 앞의 세 포지션의 작가들과의 의논은 있겠지만, 색감과 색 결정에 있어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받는다. 작가진의 이름을 병기할 때 세 번째로 나오지만, 잉커 포지션이 별도로 있다면 네 번째로 나온다.
레터러 letterer 는 말풍선 안의 글이나 효과음 표현용 캡션 등의 폰트를 결정하는 포지션이다. 이쪽이 채식가로 번역되는 경우도 많다. 스토리에 따라 글을 쓰기에 스토리 작가의 지휘를 받지만, 폰트 디자인과 문장 배열 디자인 등에서 자율성을 보장받는다. 작가진의 이름을 병기할 때 마지막으로 나온다.
이런 작가진을 팀으로서 조직하거나, 아이디어나 컨셉 등을 팀에게 지시 혹은 팀과 의논하는 역할을 편집자 Editor 가 맡는다. 노동자인 작가들보다는 사용자인 회사 쪽에 가까운 탓에 작가진의 이름을 병기할 때는 빠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작품 기획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크레딧에는 포함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작품을 세세하게 분석하는 비평 작업에서는 스토리 작가와 함께 인터뷰 대상이 된다.
이렇게 분업화가 되면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 스토리 작가 한 명이 여러 편의 스토리를 동시에 쓰고, 그림 작가 한 명이 여러 편의 그림을 동시에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수퍼히어로 코믹스는 물론이고 코믹스 전반에 걸쳐, 역사 초기에는 편집자가 작가 크레딧의 전면에 나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뒤로 물러나고 스토리 작가부터 레터러까지의 작가진들이 크레딧의 전면으로 나서게 된다. 이런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코믹스 이슈 뒤편에 실리는 독자들의 팬레터 소개 파트다. 초기에는 편집자의 이름만 노출되었고 그래서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였지만, 차츰 팬레터를 받는 주체가 작가들 – 특히 스토리 작가로 변해 간다.
회사와 편집자가 작품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팀을 조직하기 때문에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저작권은 회사가 갖는다. 작가들이 먼저 작품의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행정상의 주도권은 회사에 있다. 따라서 같은 캐릭터를 가지고 서로 다른 작가들이 다른 이야기를 동시에 만들어낼 수도 있다. 같은 사건을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다른 시점에서 동시에 바라볼 수도 있다. 이런 시도를 타이인 tie-in 이라고 부르지만, 아직은 후일의 이야기다. 우리는 아직 대공황 말기의 30년대 후반에 있다.
다만 창작 시스템이 성숙하기 이전인 3, 40년대에는 작가들의 크레딧이 이슈 표지에 나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만화의 저작권과 판권은 회사의 것이기 때문이다. 팬레터가 초기에 편집자에게 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크레딧 표기와 권리 배분의 문제는 이후 작가 조합이 등장하고 업계 유명 작가들이 실력을 행사하는 등의 여러 물밑 진통이 지나간 후에 해결된다. 그래서 우리가 집어든 액션 코믹스 #1 이슈의 표지에는 수퍼맨이 그려져 있지만, 동시에 수퍼맨의 창조자인 제리 시걸 Jerry Siegel 과 조 슈스터 Joe Schuster 의 이름을 볼 수는 없다.
조합이 생겨서 배급 권력을 얻었고, 선배 코믹스들의 성공으로 시장 영향력도 입증됐다. 컨텐츠 또한 펄프 픽션에서 가져온 소재로 채웠다. 회사들의 조합은 저작권이나 배급권의 분쟁을 조정하고 작가들에 대한 사용자 조합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생겨난 작가 조합은 회사와 회사 조합에 대항하는 노동조합의 역할을 맡으면서 시장의 질서를 만들어갔다. 시장에 내놓을 장르명으로 코믹스라는 용어도 정착됐고, 작가들이 분업화된 팀으로 조직되어 매주 혹은 매달 이슈를 생산해내는 창작 시스템도 작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조성된 환경에서 수퍼히어로 코믹스가 탄생했다.
이 모든 조건이 조성된 후인 1938년 6월, 우리는 미국 대도시의 가판대에서 액션 코믹스 #1 이슈를 10센트를 내고 살 수 있게 되었다. 표지에 그려진 캐릭터는 수퍼맨이었다. 그리고 수퍼맨에서 수퍼히어로의 정의가 나왔다.
1) 초능력 혹은 그에 준하는 특수능력을 갖고 있다.
2) 개인 이익과는 무관하게 선한 공익 목적에 투신하는 영웅 활동을 한다.
3) 캐릭터의 상징이 되는 코스튬을 입는다.
2번에서 목적이 악한 목적이 되면 수퍼빌런이 된다.
영웅 계열 캐릭터에 새로운 카테고리를 더한, 외계 행성에서 왔다는 이 난민 초능력자는 수퍼히어로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빅뱅이었다. 이제 그 폭발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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