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에겐 버려져도, 누군가에겐 필요한 존재들의 자리
살림이 늘면 다른 물건들도 저마다 자리를 이동한다. 자리란 원래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것. 전례가 아니었다면 집에 꽃이 올 일은 전무하다. 내게 꽃은 너무 사치스러운 존재. 나 한 사람 즐거우라고 볕 안 드는 방에 들이기엔 과하고 가혹한 일이다. 게다가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건 더 애잔하고 괴롭다.
국화와 이름 모를 싱그러운 꽃들이 오고, 갑자기 창가에서 말벌들이 윙윙대기 시작했다. 방충망에 걸려서 허우적거리는 걸 몇 번이나 구해 주었다. 이 새 손님이 옴으로써 말린 꽃과 디퓨저가 상석을 내어 주었다.
하나의 대상이 주체 언저리에 머물면 주체의 자리 역시 이동하거나 확장되기 마련이다. 나도 그렇고, 집 안의 다른 사물들도 조금씩 위치를 바꾼다. 그렇게 자리를 옮겨가며 가장 조화로운 위치를 균점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나 사물들의 관계란 본디 그런 것, 그 균형과 질서 속에서 가치가 드러나기도 한다. 특히나 생명 있는 것들은 더욱.
관계를 맺는 것도 그런 거라 생각한다. 아무런 미동 없이 주체가 제자리를 고수하거나 눌러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오려면 오고, 갈 테면 가라'는 식이 아니라, 함께 움직이며 변화해야 한다. 세계는 그런 관계들에 맞물려 확장된다. 여기서 세계란 물리적 공간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며칠 전, 내가 사는 빌라 앞에 누군가 폐가구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그중 하나가 쓸모 있어 보여 집으로 들였다. 길에 내앉은 폐물건을 집에 들인 건 처음이었고, 그래도 손님이라고 잠시 설레었다. 허한 자리에 낡은 의자 하나 앉혔을 뿐인데 방이 가득 채워진 것 같았다. 도리어 공간이 한결 여유가 생긴 느낌이었다.
어떤 이에겐 버려져도, 누군가에겐 필요한 존재들이 있다. 의미란 관계성 안에서 생겨나므로 절대적이라기보다 상대적이다. 시든 꽃이어도 향기롭고 버려진 의자라도 쓸모 있듯, 모두 다양한 방식과 각각의 기준에서 가치 있다. 생화는 생화대로, 말린 꽃은 말린 대로 곱다. 이 싱싱한 꽃들도 곧 마르게 될 터, 더 곱게 말려 오래 두고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주체나 대상이든 모두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임시적인 거처를 마련한다. 끊임없이 유동하고 변화하면서 성장하고 소멸한다. 소멸이라는 것도 결국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생명과 생성의 에너지 역시 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므로 한 자리에 고이면 금세 썩고 만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 흐르고 순환되는 과정과 '지속'으로서의 존재일 뿐 고정될 수 없다. 인간이든, 대상으로서의 물질 모두 결국 세계 속에서 분자적인 존재자로 머물다 갈 뿐이다.
자리 비울 시간, 나도 슬슬 이사할 준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