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hahoho할머니 Apr 27. 2024

호우시절: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광저우에 우기가 시작되었다.

푹푹 찌는 더위 사이로 비가 양동이로 들어붓듯이 내린다. 비도 한 번 쏟아지면 대륙의 비답게 거대하다.


위층 리모델링 공사는 한 달 넘게 진행 중이다.  아마 집주인이 들어 올모양인가 보다. 이곳사람 들은 전에 살던 사람의 물건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다 걷어낸다고 한다.

살던 사람의 나쁜 기운을 다 걷어 내야 하기 때문이라 한다.

벽도 바닥도모두 걷어 내는지 굴착기로 긁어내는 듯한 -들들들 - 굉음을 비롯해서 공사 장비의 소음 때문에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공사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아파트도 단단하게 지어진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떤 때는 이러다 아파트 무너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도를 보니 이곳은 지진대가 아니다.

그도 다행이고.


오늘은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하자.


아이들도 이제 학교 생활에 적응된 듯하고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긴 하지만 나도 이제는 아이들의 공부와 생활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방향도 잡았다.


한국에 있을 때 작은 아이는 감기를 자주 앓았다.  감기 끝엔 중이염이 왔고. 딸도. 사위도 해외 출장이 잦은 직장이라 아이들은 그때도 나와 같이 자야 할 때가 많았다. 중이염으로 아파하는 아이를 업고 밤을 새웠던 일도 많았다.


여기 온 후론 그렇게 아팠던 적은 없다. 공기가 한국보다 깨끗하고 따뜻하고 습기 많은  날씨 덕분인가  싶다.


이만 하면 됐지.

여기서 뭘 더 바라겠는가?


작은 아이는 다음 주 월요일(4월 29일), 큰 아이는 5월 2일 학교 assembly에서 주인공 -정 화 -역을 맡았고 벌써 대사도 완벽하게 외웠다. (정화 ㅡ서양의 대 항해 시대 보다 더 일찍 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까지 항해했던 명나라 때의 환관)


한국에 있는 작은 딸네 1년 5개월 된 귀염둥이 쌍둥이들도 벌써 3분이나 갈비를 뜯는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누구는 이 나이쯤에 졸혼을 꿈꾼다고 하지만 나는 모양 좋게 졸혼도 되었다.


일용할  양식도 충분하고 내일도 모레도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고.


 호숫가 아름다운 카페에 앉아 죽죽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보고 있으니 더 바랄 것 없이 만족스럽다.


누군가는 부모 형제 친구 떠나 먼 곳 서 외롭지 않으냐고 하지만  나는 사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보다 나와 노는 게 제일 좋고 편하다.


이 나이쯤 되면 부모 있는 사람 별로 없을 것이고, 친구도 가끔 만나야 좋고, 형제들도 1년에 한두 번  만나 잘 살고 있나 확인 정도면 된다.


5년 전에는 뉴질랜드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 사위가 주재원으로 가 있었고 딸이 둘째를 낳을 때가 되어서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갔더랬다.


내가 살았던 웰링턴에서는 겨울에 비가 이렇게  많이 왔다.  

거대한 천둥소리와 번개도 함께.

 

한 번은 아기 주먹 만한 얼음덩어리도 우두둑 떨어졌다.

그리고 비가 그치고 나면 무지개가 떴고.

색깔도 선명한 쌍무지개를 볼 수 있는 날도 더러 있었다.

집 앞 개천 에도 블랙 스완이 오리처럼 태연하게 떠다녔고.

집 근처 공원이 마치 ‘반지의 제왕’ 영화의 배경처럼 고사리 숲이 깊었다.  한 나라의 수도 임 에도 어디를 가나 언제나 한적 했고.

이곳 광저우는 어디를 가나 사람이 많고 소란스럽고 이도 저도 아니면 영원히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은 냄새가 공간을 채운다.


직원이 테이블을  닦는다.

손에 들린 물걸레에 내 시선이 따라다닌다. 여기 온 후로 생긴 버릇이다. 물걸레 하나로 테이블 모두를 닦고도 씻지 않고 다시 두었던 곳에 둔다.

손님이 나가면 저 걸레로 테이블을 다시 닦으러 갈 테지.

그가 닦고 지나간 테이블에서 신내가 난다. 괜 찮다. 물 티슈를 두 장 꺼내어 닦으면 되니까.  

이런 사소한 것이 거슬리는  이 시간이 좋다.

이렇게 살다가 어느 날엔 생각지도 못했던 나라에서 이 세상 조용히 떠나게 되어 구천을 떠돌며 영원한 여행자의 혼으로 사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건너편 테이블엔 젊은 주재원 부인들이 모여 아이 학교 보내고 난 뒤의 오전 시간을 수다로 풀고 있다.


그 기분 알지.  


이리 오시라고 해도 가면 안 된다.


그들에게 살짝 눈인사만 한다.


<노화는 병이다> 는 제목의 방송을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다. 병이 치유되지 못하고 오래 되면 장애가 되겠지.


그들도 곧 노화가 오겠지만 아직 까지는 그들에겐 나는 할머니이고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어쩌면 좀 성가신 일을 떠맡아야 할지도 모를 한 명의 병자 일 지도 모른다.


이곳 에선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자주 내리기도 하고,  한국에 있을 때는 산행과 자전거를 타면서 지냈기에 웬만한 비는 그냥 맞고 다녔고, 손에 뭘 들고 다니는 게 싫어서 해가  쨍쨍해도 양산이나 모자 같은 거 안 쓰는데 젊은 엄마들이 우산을 씌워 주는 친절함 뒤에 따라 붙이는 ‘할머니 보면 우리 엄마 생각이 나서요.’ 하는 말이 나는 듣기 싫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비행기 타고 몇 시간만 와도 이렇게 날씨가 다른데,  사람도 얼마나 서로 다를까?


어떤 엄마?


얼마 전 아이들 학교 엄마가 딸에게 점심을 먹자고 전화를 했다. 학교 행사에서 만나게 된 사람인데 이야기를 터고 보니 내가 살던 경상남도 쪽이 고향이었다. 손까지 마주 잡고 흔들며 그쪽이 더 반가워했다. 이곳에 온 지는 우리보다 1년 먼저 와서인지  맛집도 많이 알고 있었고 여기서 가까운 하이난 섬. 홍콩 디즈니랜드, 마카오에 갈 만한 곳까지 좋은 정보가 많은 사람이었다.


학교에 갔을 때 딸에게  서로 인사를 하도록 해 주었다.

좋은 정보가 많은 사람이니 밥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딸은 자기가 바쁘니 학교에 자주 가는 엄마가 그 이와 친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약속한 식당으로 함께 나갔다.


나를 보는 그 이의 눈빛에

‘뭐야. 인사치레로 오시라고  했는데 정말 눈치 없이 따라왔네’라는 당황스러움이 있었다.  


동생이 넷이나 있는 맏이라서 어릴 적 친구들에게 놀러 가려면 동생을 데리고 가야 할 때가 많았다.

난감 해 하던 내 친구들의 그때의 눈빛.

내겐 너무나 익숙하지.


식사하다가 그 이의 이야기에 취해서 위쳇신청을 했다.

거절당했다.

며칠이 지나도 수락되지 않길래 잊으셨나? 하고 딸이 그이에게 문자 하니 ‘제가 아무나에게 친구 수락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요.‘라는 대답이 왔다.


헐 ㅡ

어쩌라고


같은 또래의 아기를 키우고 있으니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내 입장이고 그들에겐 이웃집 아픈 할머니였을 뿐.


늘 생각했다

낄끼빠빠를 잘해야 한다고.

끼일 때 끼이고 빠질 때 잘 빠질 줄 알아야 한다고.


지금 딸 네와 같이 살고 있지만 사위가 와서 그네들이 외출하려 하면 나는 빠지려고 한다. 그들의 가족이라는 일체감에 나로 인해 서 작은 틈이라도 벌어질까 봐서이다.

 낄끼빠빠


40대 초반이었나.

내가 다니던 성당 마당 등나무 아래에는 주일 미사 마친 어르신들이 앉아 쉬고 계셨다. 마침 지나가다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이고. 곱다. 나이 젊으니 뭘 입어도 곱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그중에 젊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팔구십대로 보이는 할머니가  분홍색 꽃무늬 옷을 입은 육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할머니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손녀를 키우려고 딸에게 왔을 때 새삼 아기를 키우려니 불안해서 베이비 시터 교육을 받고 자격증까지 땄던 적이 있다.

그때 배운 것들을 다 잊었지만 두 가지는 늘 새기고 있다.  


하나,

신생아들이 스트레스가 그렇게 많다고 했다.

매일매일  쑥쑥 자라고,

전 생명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고

울음소리로만 의사 전달을 해야 하며,

세상 모든 것이 다 처음인

아기들이 매일 겪는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마사지도 자주 해줘야 하고 좋은 음악도 자주 들려줘야 한다고 했다.

생각해 보지 않았던 말이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 교육을 잊지 않고 나는 아이가 잘 때나 안아 줄 때도 팔다리 등을 자주 쓸어 준다.

잘 때는 내가 좋아하는 헨델의 '라르고'를 들려주고.


두 번째.

자존심에 관한 교육이었다.

베이비 시터 일 하면서 겪을 일에 대비해서 마음 무장 시키려는 의도로 해 주었던 이야기였던 거 같다.

이야기는

어릴 적 고향 친구 둘이 나이 들어 만나 식당에 갔더란다.

두 분 다 갈비 보통을 주문하니 종업원이 돌아서서 주방을 향해, “갈보 둘이요!” 하더란다.

그 말을 듣고 함께 온 친구가 “우리가 옛날에 갈보였던걸 저 사람이 어떻게 알았을까? 했다는.


자존심 상했다는 생각.

남이 나를 무시한다고 느끼는 것도 이와 마찬 가지다.

일체 유심조.  

다 마음이 만드는 허상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수도권이어서 6.25 전쟁의 피해를 심하게 겪어서 인지  남쪽 지방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슬픈 역사가 묻은 재미있었던 이야기였다.


한국에 있을 땐 나는 어디를 가나 젊은것 축에 끼였다. 게다가 아기 키우는 할마였고. 그래서일까.  

노인으로 살 준비가 안 되었던 것이다.

돋보기 없인 글자 하나 제대로 읽을 수 없음에도.

 

그래도 기억을 헤쳐서 비방을 찾아본다.


산을 탈 때도, 자전거를 탈 때도, 탁구를 칠 때도

시선은 멀리 두고,

허리는 세워 몸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

어깨에 힘 빼고

허벅지에 힘을 줘야 한다.


기분 같은 거.

자존심 같은 거.

나이 들어간다는 거,

숨 가쁘게 달려가는 세상을 따라 잡가 힘들고,

살 수록 분명한 게 없어 보여 불안하더라도


허리 세우고

시선은 멀리 두고

어깨 힘 빼고

발바닥은 단단히 딛고


살기로

한다.


좋은 비는 계속 내리고

아직 아무 일도 안 생기는 이 시간이

참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