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팬데믹 패닉 시대, 페미-스토리노믹스> 임옥희 (지은이)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최근에 임옥희 교수의 책 <팬데믹 패닉 시대 페미-스토리노믹스>를 읽어보았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이고, 내가 요즘 관심있는 주제에 대한 풍부한 시선으로 가득해 발췌를 많이 했다.
우선 '페미-스토리노믹스'라는 개념에 대한 본문의 설명이다.
<혐오에서 공감으로 유도하는 통화(Currency)가 이야기이다. 그런 통화가 페미 스토리 노믹스다. 페미-스토리노믹스는 페미니즘+스토리텔링+이코노믹스의 합성어로서 필자의 조어다. 무력하고 가난한 이야기가 여자들의 힘이자 돈이 되고 여자들의 생존과 생계에 핵심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사회적 약자들의 이해관계를 협상하고, 정치경제적 불평등을 비판하며, 시민적 정의를 설득하는 페미-스토리텔링에 바탕한 페미니스트 페다고지(교육학)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 사변소설은 혁신적이고, 재밌고, 경이로운 페미-스토리텔링을 제공한다.>
같은 책 180페이지 '장애'를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근대의 이상적 주체는 남에게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근대적 이상과는 달리,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누구나 취약하고 타자와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살아간다. 누구나 취약하고 타자와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살아간다. 누구도 타인의 도움 없이 완벽하게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살 수 없다. 비장애 중심의 ‘정상성’을 기준으로 볼 때 장애는 차별과 배제와 낙인의 대상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특정한 형태의 몸에 맞추어 설계된 세계가 어떤 종류의 몸들을 장애화 하는 것이라고 작가 김초엽은 단편소설 <인지공간>에서 지적하고 있다. 김초엽 작가는 자신이 청각장애인임을 밝히면서 카톡 문화는 말하는 사람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청각장애인들에게는 구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장애의 사회 구성적 모델에 따르면 장애는 손상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되는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이처럼, 무엇을 장애로 정의할 것인지도 사회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청각의 기능을 소실한 사람이 더 많은 사회에서 주 언어는 수화가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시각 장애는 여전히 장애인이 될지언정, 청각 장애라는 말은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음성 언어는 시각장애인만이 사용하는 비주류 언어화될 것이다.
같은 책 185페이지 '불구의 시간성'에 대해
<불구의 시간성(crip time)은 차이와 다름의 시간성이다. 인간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서로 다른 속도로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의 시간을 표준화하고 정상화하여 모든 시간을 일직선으로 고정시킨 것을 비틀어서 시간의 불구화를 지향하는 것이 불구의 시간성이다.
장애 운동가 앤 맥도널드는 달팽이만큼 느린 속도로 삶을 슬로우 모션으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 노화를 경험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노인의 느릿느릿 감각, 지각되는 속도는 젊은 세대가 경험하는 속도와는 다르다. 각자가 불구의 시간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장애인들에게만 정상적 표준적 능률적인 시간을 살지 않으면 쓸모없는 존재처럼 배제한다.>
같은 책 188페이지
<비장애 중심주의는 비인간 동물과 장애인의 삶과 경험 모두에 가치가 없다고 폐기처분을 정당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기여한다. 그런 시스템은 상이한 방식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
장애인들은 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평등과 동등권을 위해 싸우지만 동시에 그들이 가진 차이와 다름(장애와 제약) 역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장애 운동가들은 장애인이 장애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장애로 인한 몸의 체현, 세계의 인지 방법, 그로 인한 경험의 다양성 자체가 가치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애 문화에 대한 이런 식의 가치 부여는 동물 관련 정의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동물은 인간이 믿고 싶은 것보다 훨씬 더 인간과 유사하면서도 동시에 대단히 다르기 때문이다.
수나우라 테일러가 말하는 동물윤리의 ‘불구화’ 기획은 비장애 중심주의가 어느 정도로 종 차별주의에 기여하는지 밝히는 것에 덧붙여, 그것이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커뮤니티에 어떤 방식으로 스며들어 잇는지 검토하는 일을 동반한다. 예컨대 인간의 건강에 초점을 둔 비건 캠페인에서 장애는 항상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비유로 사용된다. (…) 동물이라는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한 목소리’라는 구호다. 동물들은 농인들처럼 목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의 언어를 알지 못할 뿐이다. 누가 목소리를 가졌고 가지지 못했는지를 정의하는 일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목소리 없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침묵을 강요받았거나, 듣지 않으려 하기에 들리지 않게 된 자들이 있을 뿐이라고 아룬다티 로이는 통렬하게 지적한다. 목소리를 상실한 동물처럼 장애인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의 필요와 욕망을 표현할 기회조차 갖기 힘들었다. >
같은 책 195페이지 반려종 선언
<반려종은 유기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김원영은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문>에 영향을 받은 듯 휠체어를 하나의 반려종으로 선언한다. 그에게 자신의 휠체어는 자신과 접속되어 있는 하나의 반려종이다. 앨리슨 케이퍼 또한 <크립 친족 선언하기>에서 수나우라 테일러가 그린 휠체어 이미지를 분석한다. 그녀에게 휠체어는 차가운 금속성 재질이 아니라 털북숭이 강아지처럼 따뜻하고 신나게 바퀴를 굴리면서 달릴 수도 있는 친근하고 유쾌한 생명체로 보인다. 휠체어 장애인에게 휠체어는 시각장애인의 안내견만큼이나 접속되고 합체되어 있다.
<크립테크노사이언스 선언>은 크립을 재해석하고 재전유함으로써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도전한다. 크립은 불구, 경멸적인 어휘로 병신이라는 뜻이지만 ‘불구가 어때서’라는 긍정적 가치로 전환된 담론이다. 장애여성공감은 20주년 선언문에서 ‘불구’라는 어휘를 자긍심으로 재전유함으로써 그 말이 의미했던 경멸과 낙인의 효과를 제거하는 불구화의 정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불구의 시간성(crip time)>은 차이와 다름의 시간성이다. 인간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서로 다른 속도로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의 시간을 표준화하고 정상화하여 모든 시간을 일직선으로 고정시킨 것을 비틀어서 시간의 불구화를 지향하는 것이 불구의 시간성이다.
장애 운동가 앤 맥도널드는 달팽이만큼 느린 속도로 삶을 슬로우 모션으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 노화를 경험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노인의 느릿느릿 감각, 지각되는 속도는 젊은 세대가 경험하는 속도와는 다르다. 각자가 불구의 시간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장애인들에게만 정상적 표준적 능률적인 시간을 살지 않으면 쓸모없는 존재처럼 배제한다.>
~208페이지 엘리자베스 문의 <어둠의 속도>
장애를 치료와 교정의 대상도, 연민의 대상도 아닌 하나의 다름으로 보여주고 있는 SF 작품이 엘리자베스 문의 <어둠의 속도>다. 장애는 교정의 대상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신경다양증자의 이야기다.
<어둠의 속도는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상호의존과 상호 보살핌은 인간의 삶의 조건이다. 의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세 살이면 벗어나게 되는 기저귀를 다시 차게 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을 보게 되면, 내가 저런 처지가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기며 그런 불구의 시간성을 사는 사람들이 어디 별세계에 있는 것처럼 연민하면서 장애를 그들의 개인적인 치부이자 개인적인 문제라고 환원시킨다.
퀴어와 장애의 교차점에서 인간과 다른 종으로서 동물들, 이 지구상에 서식하는 모든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한 근대적 패러다임은 그 시효를 다했다. 그럼에도 몸에 밴 습관은 용도 폐기된 이후로도 오래 남아 있는 법이다. 변화에 저항하면서. 그런 변화의 시간성은 다름 아닌 불구의 시간성이며, 이것과 만나야 하는 낯선 경험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지는 지보다 먼저 도착한다. 미래가 현재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처럼.>
<슈퍼 부자들은 스페이스 엑스를 타고 무중력을 경험하면서 지구 행성 바깥의 500km 지점의 궤도를 따라 순환하고 즐긴다. 2050년 화성으로 2백만 명을 이주시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일론 머스크는 발표했다. 그들이 배출하는 탄소발자국으로 지구 행성이 쓰레기 행성이 되면 언제라도 화성으로 이주하겠다는 계획을 아무렇지도 않게 발표한다.
그와는 다른 방향에서 유럽우주국은 계급, 인종, 젠더, 종교를 떠나, 각 부문의 공정한 대표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고민은 신체적 장애, 소수자에게 우주비행사의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공정할 수 있는 대안을 상징적으로 제시한 셈이다.
이런 시대에 다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 행성에서 인간만이 특권적인 존재로서 지구자원을 독점하지 않을 수 있는 공존의 윤리로 지속 가능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취약성에 노출된 나약한 종들은 갈등하고 싸우고 죽이면서도 그런 기획이 실패한 틈에서 서로 연대하면서 살아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약자들끼리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절박한 시대적 요청이므로.>
책을 읽고 나서
많이 영감을 받았고, 많이 반성했다.
불구의 시선 (crip view)이라는 개념에 대해 읽고 보니 내게 보이지 않던 세계의 장막이 걷히는 느낌이었다. 사람은 누구에게 얼마나 공감할지를 정해놓고 공감한다. 나는 근대적 정상 인간의 범주에 스스로를 넣고,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공감하지 않고 살았다. 어쩔 수 없다면서 그들을 타자화 했다. 나는 외면하는 편이 덜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외면하는 것이 더 불편함을 느낀다.
불편해지고 나서야 보이는 세계가 있다. 불편함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세상의 양상은 더욱 풍부해진다. 불편함이 우리를 풍부한 생각과 가능성의 세계로 이끈다. 불편함이 더 풍부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는 개념은 신선하고 늘 불편하던 나 같은 사람의 마음을 오히려 편안하게 한다.
채식을 하고 퀴어를 알고 페미니즘을 배우고 동물권에 대해 생각하고 장애라는 폭넓은 단어에 대해 생각하면서 세상을 바라볼 때 기존의 질서는 해체되고 또 다른 세상이 눈앞에 보인다. 분명히, 불구의 시선이 세상을 보는 내 관점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른의 시선과는 다르다. 그처럼 장애인의 시선, 소수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도 우리 사회가 근대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만들어 놓은 정상인의 시선으로 본 것과는 다를 것이다.
불편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우리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내놓는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혐오가 당연한 권리인 양 인식되어 버린 시대, 노인, 성소수자, 어린이, 장애인 혐오가 넘쳐나고 있다. 이른바 근대적 정상 인간들은 오로지 생물학적 우연성에 의해 획득된 신체/정신적 건강함을 자신의 우월성으로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포용력 없음을 괴시 하기 위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혐오를 표현한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상호의존적이고 환경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또한 취약한 존재인지 깨달았다. 그러므로 소수자와 약자를 바라보는 배제와 차별의 시선을 걷어내고 진짜 불구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시도해야 한다.
여성들이 불편함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후에야 우리는 우리 삶에서 겪고 있었지만 문제시하지는 않았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 됐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의 이동권 시위를 통해서 논란이 불거진 이후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다른 시선으로 대중교통을 바라봤다. 대중교통은 이동하는데 별 어려움 없는 이들 신체 기능을 중심으로 꾸려져 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문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과격한 시위라는 형태로 그들이 목소리를 낸 것이다.
불구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시도는 마치 일부 사람들만의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완벽한 강자도 약자도 없다. 누구나 불구의 시간성 속을 살아가게 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우리 사회가 장애라고 명명한 신체적 기능의 소실 혹은 어려움들은 누구나 신체적 기능이 쇠하는 노년이 되면 겪을 수 있는 문제다. 따라서 우리는 불구의 시선을 미리 학습하고 시도해 봄으로써 세상이 지운 존재들이 뚜렷해짐을 느끼고, 모두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임을 다시 깨달을 필요가 있다.
<페미-스토리노믹스>는 비교적 어려운 어휘들을 쓴 학술서와 비슷한 서적이지만, 좋은 여성 사변 소설(페미니즘 sf소설)에 대한 예시가 풍부하므로 관심이 있는 분야라면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