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 리브랜딩
간간히 정보성 글로 찾아뵈었지만 장문의 아티클을 쓰는 건 오래간만인 거 같습니다. 저는 이제 전역한 지 두 달이 되어가는 시점인데, 전역과 동시에 시작했던 리브랜딩 프로젝트 하나를 최근 마무리했습니다.
군 입대로 인해 오랜 공백기 후 첫 브랜딩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저를 무려 2년 동안 기다리셨다는 클라이언트분 덕분에 설렘 반, 부담 반으로 작업을 진행했던 거 같아요.
다행히도 잘 마무리되어서 프로젝트 회고 겸 소개해드리기 위해 글을 작성해봅니다.
저는 아이덴티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곧장 디자인 작업에 착수하기보다는 브랜드의 방향성을 정하는데 공을 들이곤 합니다. 디자이너가 브랜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디자인은 결국 맞지 않는 옷이 되어버리게 되고, 브랜드의 지속가능성을 저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느 초기 브랜드들이 그렇듯, 해시 또한 브랜드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전 설문과 미팅을 통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래 항목들이 그 일부입니다.
브랜드명의 의미
비즈니스 모델 (무엇을 판매하는가?)
브랜드 포지셔닝 (동종 업계와 비교했을 때 어떤 점들이 유사하고 다른가?)
주요 타겟층 (어떤 유형들의 고객들에게 어필하고 싶은가?)
핵심 가치 (브랜드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들은 무엇인가?)
이를 토대로 정리한 해시는 이렇습니다.
하루의 마지막 시간대(오후 9-11시)를 의미하는 한국의 민속 언어 '해시'에서 유래한 브랜드명은 사람들이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는 홈리빙 제품(가구, 식품, 코스메틱)을 만들자는 뜻이 포부가 담겨있습니다. 한국의 전통적 라이프스타일과 건축에서 영감을 받은 해시의 제품은 정갈하고 우아함이 있으며, 건강에 관심이 많고 일상 속에 특별함을 찾길 희망하는 사람(20대 <30대(코어)<40대)들을 타깃으로 합니다.
간혹 완전히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시작할 때보다 리브랜딩이 막막할 경우가 있습니다. 기존의 아이덴티티가 완성도가 높은 경우에는 시각적 변화를 주기가 어렵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무엇을 유지할지, 과감히 버릴지 신중하게 고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초일류 기업들이 억대의 리브랜딩 끝에 거의 똑같은 로고를 선보이거나 그 이전의 스타일로 회귀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입니다.
해시의 기존 로고는 9시와 11시 사이의 시간대인 10:10을 형상화한 시곗바늘 모양의 심벌과 기하학적 형태의 워드마크로 구성되어있었습니다. 기존 로고의 가장 큰 문제점들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1. 로고와 브랜드와 연관성을 짓기 어렵다.
브랜드명을 내포하기 위해 시곗바늘 모양을 하고는 있지만, 추상적인 심벌의 형태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고가 연계되지 않음. 로고만으로는 어떤 브랜드인지 유추하기 어려움.
2. 시각적으로 불안정하고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다.
워드마크 속 삼각 형태로 잘린 획의 단자나 장식 요소가 투박하고 다소 도발적으로 보여 정갈하고 우아함을 추구하는 브랜드 이미지에 걸맞지 않음.
(기존 로고의 시계 컨셉이나 좁은 폭의 활자 같은 특징들은 이후 로고 스케치 중 여러 형태로도 변형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 가져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위 이미지는 4차례의 걸친 PT 사이에 나왔었던 시안 중 극히 일부를 모아둔 이미지입니다. H와 S를 섞은 형태의 심벌(12, 19, 21)이나 시계 컨셉(14, 17, 23, 24)의 시안들도 보이네요.
최종 시안인 1번은 첫 번째 PT에서부터 현재와 유사한 시안이 나왔지만 의외로 3차 PT까지 확정되지 못했습니다. (한글의 자소 시스템을 영문에 도입한 아이디어는 좋지만, 가로 배치에서 벗어난 글자의 배치와 S와 i를 합친 합자의 형태가 너무 파격적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스케치 중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와도 결국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의 로고입니다. 너무 많은 선택지는 클라이언트에게 혼란만 줄 뿐이죠. 아래는 4차례의 PT를 통해 최종 결과물까지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한글, 건축물, 시계에서 영감을 받아 3가지 방향성을 선보였다. Direction 1의 아이디어는 좋지만 너무 파격적이란 의견이 있었다.
좀 더 간결한 형태의 로고와 심벌도 보고 싶다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1차 PT의 Direction1을 포함한 세 개의 시안을 선보였다. 2차에서부터는 로고의 실제 활용 예시를 보여주기 위해 로고를 가상의 목업에 올리는 작업도 진행했다.
워드마크의 구조가 확정된 후, 다양한 폰트 스타일로 테스트를 진행했다. 내부에서 의견이 갈렸지만, 두 번째 시안이 첫 번째 시안의 우아함을 가지면서도 단단한 인상을 가져 최종 선택되었다. 3차 PT에서는 시계 형태의 심벌도 부활하였으나 워드마크와 복합적으로 활용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되어 최종적으로는 배제되었다.
최종 폰트가 확정된 이후에는 글자들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여러 시안과 세리프 장식에 곡선 요소를 넣는 등의 베리에이션을 선보였다. 추가적으로 워드마크의 약어를 활용한 심벌 형태도 제안했다.
아래가 4번에 걸친 PT 후 탄생한 로고입니다.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는 음절로 발음이 되는 한글의 고유한 특성을 영문에 적용하여, a와 e는 위아래로 묶고, S와 i는 합자(ligature)로 묶어 하나의 글자처럼 보이도록 설계했습니다.
로고는 최종 산출물에 표기되는 크기, 인쇄되는 매체, 후가공에 따라 큰 영향을 받습니다. 같은 로고라도 특정 환경에 따라 달라 보인다는 것이죠. 해시의 로고 시스템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4개의 시각적 사이즈(Optical Size)와 축약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Standard: 밝은 배경에서 일반적으로 활용
Standard Small: 밝은 배경에서 50px 이하의 사이즈일 경우에 활용
Knockout: 어두운 배경 및 형압 같은 후가공에서 디테일의 저하가 고려되는 경우에 활용
Knockout Small: 어두운 배경에서 50px 이하의 사이즈일 경우에 활용
Shortened: 50px의 사이즈에서 공간의 제약으로 디테일이 표현되기 어려운 경우 제한적으로 활용.
이렇게 봐서는 이해하기 어려우시다고요? 아래의 자료를 통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어떠신가요? 오른쪽 어두운 배경 속 사각형이 더 크게 느껴지지 않나요? 어두운 배경 위 밝은 물체는 밝은 배경의 물체보다 확대되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일으킵니다. 이는 사람의 뇌에서 빛에 반응하는 뉴런이 어둠에 반응하는 뉴런보다 사물의 상을 더 왜곡시키기 때문이죠. 해시의 로고타입은 어두운 배경에서는 획의 두께를 줄이고 간격을 미묘하게 넓혀 이런 착시 현상을 최대한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로고가 소형 화면에서 활용되는 경우는 어떨까요?
위 이미지는 로고가 10pt 높이의 크기로 종이에 인쇄되었을 경우를 Standard형과 Small형을 비교한 이미지입니다. 우측의 Small 형이 획의 아웃라인이 선명하고 판독성(legibility)이 뛰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완성된 로고는 명함, 소봉투와 같은 지류 어플리케이션에도 다양하게 활용했으며, 더 나아가 로고를 확대하여 크롭 한 패턴을 패키징, 포장지 등에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안했습니다. 향후 해시의 새로운 로고를 나올 제품들이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