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옥과 희에게
작년 겨울, 잘 살고 싶어서 글쓰기 수업을 등록했어요. 그런데 글쓰기를 잘하려면 일단 써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잘 살고 싶어서 저를 쓰기 시작했어요. 잘 살고 싶다는 게 뭐였냐면, 일단 말 그대로 죽지 않고 살고 싶었고요. 그러려면 그렇게까지 망한 내가 해명돼야 하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잔뜩 엉망으로 꼬이고 엉켜버린 실뭉치를 버리려다가, 손에 꼭 쥐어보니 애틋해져서, 이리저리 굴리고 꼬집고 잡아당겨 풀어보려는 시도를 시작했어요.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색도, 질감도, 모양도 다른 각자의 실을 쥐고 모인 동료들과 함께요.
물을 보는 게 좋아요. 흙 내음과 나무 소리보다 더 좋아해요. 잔디의 감촉보다, 저무는 해가 주는 감동보다 더요. 물비린내가 향기롭게 느껴질 만큼 물결을 보는 게 좋아요. 그래서 저는 제 실뭉치를 쥐고 자주 물가에 가요. 얼마 전에도 갔는데, 그날은 좀 망한 날이었어요. 마음이 버석버석 가뭄에 들었거든요. 감정의 분진이 맥락 없이 일어서 그 안에서 무엇도 포착할 수 없었어요. 한 문장도 쓰지 못한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아 부아가 났어요. 저는 고요히 살벌해졌어요. 실뭉치를 쥐어뜯고 싶어진 거예요. 슬퍼졌어요. 그런데 그동안 읽고 쓰면서 제 안에 떠오른 문장이 있거든요. ‘정답은 사랑이다.’ 타이핑했죠. 눈으로 보니 하얀 화면에 묻은 것처럼 짧고 작았어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살벌함은 누그러지고 마음의 분진이 가라앉더군요.
그날 간 강가의 카페는 나주에 있는 카페 “루”. 들풀과 억새를 가르는 기다란 다리를 건너면 닿는, 기둥 위에 우주선을 올려둔 것처럼 생긴 길쭉한 건물 2층에 있는 곳이었어요. 그곳에 앉아서 하염없이 강물을 내려다봤어요. 그날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물결의 굴곡이 짙었어요. 물결 다섯 줄 정도만 유심히 보기도 하고, 최대한 시야에 담을 수 있는 만큼 가득 담아 전체적인 물결을 보기도 했어요. 바람 따라 치는 물결은 일정하고 부지런해 보였어요. 지난겨울 기린님의 책 <관계의 말들>을 읽고 그렸던 그림, <함께하는 파도>가 떠올랐죠. 책 속의 관계들과 기린님의 문장들, 그리고 동료들과의 글쓰기 경험에서 다양하게 흔들리는 우리들을 떠올리며 그렸거든요. 그림 속의 파도 넷은 행복과 슬픔 같은 감정들을 머금고 함께 흔들리고 있어요. 울면서, 웃으면서, 무표정으로, 손을 꼭 잡고요.
그거 아세요? 강물의 표면은 한 방향을 향하지 않는다는 거요. 저는 그날 처음 알았어요. 바라보던 강물을 유심히 보니 어느 순간 물결의 방향이 역행하더라고요. 희한했죠. 어느 기점인지는 묘연하지만, 그 묘연한 경계를 중심으로 왼쪽 물결들은 아래로, 오른쪽 물결들은 위로 흐르고 있었어요. 표면의 물결은 사방에서 부는 바람의 결을 따라 각자 흐르고 있더라고요. 빈틈없이요. 물결들은 서로 교차해요. 그런데 그 지점은 노력해도 포착하기 어려웠어요. 눈에 힘을 주고 보아도 안 보여요. 하지만 분명 교차했고, 확연히 물결은 정반대로 흐르고 있었죠. 눈앞에서 흐르는데도 볼 수 없었어요. 보기 어려운 경계를 찾겠다고 얼마나 눈에 힘을 줬다 풀었다 했는지 몰라요. 한창 그러고 있다가 스스로가 웃기고 짠해졌어요. 바람을 그리겠다던 누군가도 떠올랐고요.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게 많더라고요. —심지어 알고 있던 것도 촘촘히 새로 깨쳐야 하던걸요— 분명 존재해도, 보여도, 없는 셈 쳐지고 아닌 샘 쳐지는 존재와 관계와 사실들도 있고요. ‘세상이 바보라서 그러는 걸까’ 생각하다가도, ‘교차하는 물결 같은 거라서 모를 수밖에 없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실뭉치를 꼭 쥐어보니 알겠더라고요. 나한테도 분명히 있는데 포착되지 못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는 걸요. 강가나 바다에서 많은 걸 배워요. 물결은 실뭉치를 풀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하기도 하고, 풀어보라고 부지런히 등을 밀어주기도 해요.
요즘 제가 서울을 자주 가요.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들이 자꾸 모인다는 데 함께하고 싶어서 부지런히 다니고 있어요. 함께 글을 공유한 동료들이에요. 뭐 하는 사람들인지, 몇 살인지는 잘 몰라요. 그저 그들이 각자 골라 보여준 실뭉치들만 기억해요. 사흘 전에는 그들과 함께 강을 보러 갔어요.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이들이 많아서 검고 붉게 반짝이는 물결이랑 여러 사진에 담겼어요. 그날 기린님이 제가 그린 <함께하는 파도>가 떠오른다고 했어요. 가까이에 일렁이는 물결. 관계. 실뭉치들. 그 순간도 이제 저에게 참 소중해요. 도대체 뭐 하고 오나, 왜 자꾸 올라가나 궁금했지요? 이 정도만 말해줄래요.
오렌지와의 관계도 물결이라고, 오렌지가 엮인 아주 어려운 실뭉치가 내 안에 여럿 있다고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슬픈 얼굴은 이해하지만, 말로 하는 건 참아줘요. 말이 물성을 가지고 깊은 물속으로 등을 미는 것 같거든요. 빠져서 가라앉으면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러니 그저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이 편지도 옥희와의 실뭉치를 만지작거린 시간이에요. 사랑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이죠. 옥희. 제 말하기가 어려울 수 있어요. 물결을 포착하려는 글이라서 그래요. 그래서 그런지 쓰기도 참 어려웠답니다. 좋은 글은 아니겠어요.
옥희. 저는 언젠가 옥희와도 실뭉치를 두고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바라요.
긴 이야기를 읽어줘서 고마워요. 강물처럼 사랑해요.
-23. 10. 30. 月
-큰딸 날아 올림
*옥희는 날아의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날아의 글에서 ‘옥’은 아버지, ‘희’는 어머니를 지칭했어요.
*오렌지는 날아의 동생입니다.